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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나전칠기장 손 대 현

기자명 법보신문

영롱한 빛 빚기 40년… 명장 반열 올라

3대 장인 손꼽힌 민종태
‘수곡’ 호 이은 무형문화재

64년 오색찬란 자갯빛에
푹 빠져 장인 대장정 올라

고려 명작 복원 열정 살려
현대감각 살린 작품에 매진

돈에 눈멀어 조급증 생겼다면
당장 손 떼고 다른 길 찾아라

<사진설명>손대현 나전칠기장이 발우에 옻칠을 하고 있다. 수행정진 할 스님이 사용할 발우이기에 더욱 정성을 쏟는다.

경기도 광주 산기슭에 자리한 손대현 나전칠기장(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4호· 59세)의 작업실에 이르자 그가 나와 합장을 하며 반갑게 맞는다. “먼 길 오셨습니다!” 정성들여 모은 두 손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보내는 눈길이 참으로 따뜻했다.

그의 호는 수곡(壽谷)이다. 이채로운 것은 그의 스승 호도 ‘수곡’이요, 스승의 스승 호도 ‘수곡이라는 점이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6.25 한국전쟁 당시 어머니 등에 업혀 월남한 그는 초등학교를 근근이 졸업해야만 했다. 10대 소년 손대현은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역 부근의 한 무역회사 사환으로 일하며 세상의 풍파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나 장인의 길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이 열리던 그 해였다.

“무역회사 건물 위층에 친구 아버님이 운영하던 나전칠기 공방이 있었습니다. 자개껍질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보는 순간 푹 빠져버렸습니다.”

어린 나이, 삶의 고난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던 그에게 영롱한 무지갯빛 색깔은 희망과 용기를 던져주는 환상의 색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는 친구 아버님을 졸라 자개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바닥 청소부터 시작한 그는 5년 동안 묵묵히 정진하며 장인의 손길을 따라가려 했지만 흉내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길로 들어섰다. 1969년 당시 김봉룡, 김태휘 선생과 함께 나전칠기 3대장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수곡 민종태 선생(1998년 작고)을 찾아간 것이다.

<사진설명>일월오악도문갑.

민종태 선생은 우리나라 나전칠기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전성규 선생으로부터 ‘수곡’이란 호를 물려받은 수제자. 조선시대의 수곡 전성규 선생은 궁궐에서 유물을 관리하고 칠기를 수리하는 장인이었다. 조선 멸망 후 그는 서울에 나전칠기방을 차리며 전통 나전칠기의 맥을 이어간 인물이다.

민종태 선생이 어린 손대현을 받아들이기는 만무. 비록 그가 5년 동안 나전칠일을 했다고 하지만 거장의 눈에는 하룻강아지일 뿐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승을 찾아가 나전칠기를 향한 자신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의 정성과 열정에 감복한 스승이 6개월 만에 입방을 허락했지만 이미 20여명의 제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다시 바닥청소 등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처음엔 눈길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수 개월이 흐른 다음에야 공방서 만나면 인사도 받아주시고 눈길도 주시며 끼니도 챙겨주시더군요.”

<사진설명>모란당초문 건칠화병.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독립했다. 독립이라고 해서 당장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아니고 스승이 맡긴 일들을 하는 정도였다. 그 틈에도 그는 자신의 역량을 갈고 닦으며 조금씩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켜 나갔다. 1984년 동아공예전 입선을 시작으로 세인들로부터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전승공예대전에서만도 8회에 걸쳐 각종 상을 수상한 그는 1993년 ‘일월오악도문갑’으로 국무총리 상을 받기에 이른다.

중국, 일본,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국가로부터 10회에 걸친 초대전을 가짐은 물론 국립민속박물관에 영구 소장된 ‘모란당초능화형쟁반’ 등의 명작들을 쏟아 놓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유럽 방문 당시 정상들에게 선물한 ‘나비당초문서류함’(7점)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왕에게 선물한 ‘쌍휘문보석함’, 방한했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선물한 ‘십장생도 보석함’도 모두 그의 작품들이다. 특히 12세기 고려 ‘나전대모고려당초염주합’ 복원 작품은 그에게 특별한 것이다.

우리나라 옻칠 공예는 동남아시아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인데 고려시대 나전칠기의 기술과 조형 수준은 절정에 이르렀다.

송(宋)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徐兢)이 당시 나전칠기 공예를 보고 “기술이 정교하여 가히 귀하다(細密可貴)”고 평한 기록이 있을 정도다. 또한 원나라 도종은 고려에 경전을 보관할 나전함을 요청했는데 이와 더불어 「고려대장경」을 담을 나전상자를 제작하기 위해 ‘전함조성도감’(1272년)을 설치했다. 나전칠기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는 일면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도감에서 나온 주요 작품은 대부분 해외에 나가 있다.

<사진설명>십장생도 좌경대.

현재 해외에 산재한 작품은 일본에 8점, 미국 3점을 포함해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지에 약 20여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외 유물 중 일본 국보로 지정된 작품이 바로 ‘나전대모고려당초염주합’이다. 1995년 호암미술관 특별 전시 때 원작을 보고 재현 원력을 세웠었다고 한다.

그는 직계 제자도 두고 있지만 대학 강단에서 강의도 맡고 있다. 그가 후학들에게 던지는 일성은 이 한 마디다.

“칠기 과정 20여 단계 중 단 한 부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조급증이 당신을 엄습한다면 손을 떼고 다른 길을 찾아라.”

1970,80년대에 나전칠기장 바람이 불어 호황을 누렸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돈벌이에 급급한 사람들이 각 단계 과정을 소홀히 한 채 겉의 화려함만 내세워 대중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이 때문에 방염, 방습에 뛰어나 반영구적이라는 ‘나전칠기’의 명성은 급격히 퇴색했었다.

<사진설명>포도당초서류함.

“나전칠기는 자연예술입니다. 옻도 자연에서 채취한 것이고 전복, 소라, 거북이 등껍질 역시 자연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부분, 부분의 자연을 다시 한 번 조화시켜 새로운 자연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연을 다뤄야 할 사람이 돈에 눈멀어 조급증에 사로잡힌다면 이미 장인으로서의 생명은 끝이라는 말이다.

그의 스승 민종태 선생은 자신이 작고하기 6개월 전에 그의 호를 제자 손대현에게 물려주었다. 3대를 거쳐 내려오는 ‘수곡’의 호는 선사시대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 현대를 잇는 우리나라 장인 맥의 디딤돌인 셈이다.

그의 장인 심성은 어디서 샘솟은 것일까! 그의 작품이 진열된 방에서 작품 ‘반야심경’을 눈여겨 보았다. 전복 자개로 한 획 한 획을 만들어 써 내려 간 ‘한자 반야심경’. 그의 심성의 샘은 아마도 저 ‘반야심경’ 작품에 들어있을 것이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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