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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햇차가 주는 즐거움

기자명 법보신문

풋풋한 차향과 다가(茶歌)를 즐기다

무성해진 나무 잎 사이로 바람이 인다. 바람결을 따라 일렁이는 나무의 용틀임이 장관(壯觀)이더니 후드득 몇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제법 굉음(轟音)을 내며 시원한 빗줄기로 바뀌었다.

분명 기상대의 예보로는 내일쯤 비가 내린다고 하더니. 이런 일은 차를 따는 계절에 한번쯤 벌어지는 해프닝으로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 볼 뿐 대책이 없다. 하지만 비가 그친 후 벌어지는 운무(雲霧)의 향연(饗宴)은 ‘바로 여기’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소중한 광경이다. 더욱이 비 개인 후 해맑은 하늘과 싱그러운 풀과 땅 내음은 천금(千金)과도 바꿀 수 없는 산중의 보물이다. 도회에서 느낄 수 없는 여유로움이나 간혹 대나무 사이로 내리는 장대비를 감상하는 일은 차를 만드는 사람만이 갖는 망중(忙中)의 여유이다.

햇차가 주는 경이로움이나 풋풋하고 싱그러운 차향을 맨 먼저 감상할 수 있는 것도 특권(特權)중 하나이다. 갓 만든 차는 겉멋이 든 여린 소녀처럼 수줍은 듯하다. 하지만 차가 지닌 기미(氣味)와 열감(熱感)은 강개(慷慨)한 의사(義士)처럼 당당하다. 차를 다린다. 코끝을 감도는 순향(順香),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 비단결 같다. 등으로 퍼지는 따뜻한 기운, 촉촉이 땀이 날 듯 이내 몸이 가뿐해진다. 차를 마신 후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노래한 것으로 당나라 노동(盧仝)의 다가(茶歌)만한 것이 있을까.

원래 이 글은 맹간의(孟諫議)가 보낸 햇차에 대한 화답시(和答詩)로 ‘주필사맹간의기신차(走筆謝孟諫議寄新茶)’이란 제법 긴 제목을 가진 글이다. 노동(盧仝)은 차를 받은 기쁨과 차의 선경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황제나 왕공이 나누면 합당할 텐데 무슨 일로 산에 사는 사람에게 돌아 왔을까(至尊之餘合王公 何事便到山人家) 찾아오는 이 없는 집이지만 도리어 사립문을 잠그고 편안히 차를 마신다…(柴門反關無俗客 紗帽籠頭自煎吃…). 첫 잔을 마시니 목과 입술이 부드러워지고, 두 번째 잔엔 고민(孤悶)이 없어졌다(一椀喉吻潤 兩椀破孤悶). 세 번째 잔을 마시니 삭막했던 마음에서 오천권의 문자가 떠오르고(三椀搜枯腸 惟有文字五千券), 네 번째 잔에서는 살짝 땀이 나는 듯 평생에 불편했던 일, 모두 모공(毛孔)사이로 흩어졌다(四椀發輕汗平生不平事 盡向毛孔散). 다섯째 잔을 마시니 온몸이 가벼워지고 여섯 번째 잔은 신령과 통한다네(五椀肌骨散淸 六椀通仙靈). 일곱 번째 잔을 마시지 않아도 양 겨드랑이에서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이는 듯하다(七椀喫不得 惟覺兩腋習習淸風生). 봉래산이 어디든가. 옥천자(玉川子:盧仝)가 이 맑은 바람을 타고 돌아가려하는구나(蓬萊山在何處 玉川自乘此淸風欲歸去)”

당대(唐代)에도 차는 귀족의 물품이었다. 하물며 명차(名茶)는 산간(山間)의 한사(寒士)가 즐길만한 것이 아니다. 멀리 벗이 보낸 고결한 차, 찾아올 객조차 없는데도 사립문을 잠근다하니 차의 귀함을 알만하다. 어찌 차가 귀해서만 이랴. 홀로 마실 때가 선경(仙境)임을 안 까닭이리라. 근자(近者)에 성북동 간송 미술관에서 우암 송시열 탄신4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마침 조속(趙涑1595~1668)이 쓴 다가(茶歌)가 전시되어 있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일람(一覽)하였다. 물론 이 작품은 노동(盧仝)이 쓴 원문(原文)과 다소 다르게 썼다고 하나 원래의 뜻에 크게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7세기 조선인의 차에 대한 이해를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속(趙涑)의 속뜻은 글맛을 더 살리려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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