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생 마음속에서 부처 깨달아야”

기자명 법보신문

통도사 백련암 감원 원 산 스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에는 같은 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괴로움 없이 즐겁게 살려한다는 점이 똑같습니다. 예술, 종교, 철학도 그 근본 목표는 전부 고통 없이 즐겁게 사는 데 있습니다. 불교도 이 세상은 괴로운 것이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나고 죽음이 없는 열반의 세계에 가느냐. 거기에 근본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려고 하면 부처님이 어떤 분이냐, 어디에 계시느냐,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흔히 타종교인들이 말하기를 불교는 우상을 숭배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신 분이 부처님입니까. 부처님이라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이 되는데 불상이라고 생각하면 불상이 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불상이 되기도 하고 부처님이 되기고 하고 골동품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불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부처님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화엄경』 소초를 낸 통현 장자라고 하는 유명한 거사가 있습니다. 그 분이 『화엄경』에 대해서 지은 글 중에는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속에 있다. 자기 근기가 감당하는 바를 따라서 부처가 되고 중생이 되는 것이지 다른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 제불의 근원 자리를 알고자 할진 데는 자기의 무명 자리 그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본래의 부처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명이라는 것 때문에 부처가 안 되고 있는 겁니다. 밝음이 없다는 겁니다. 밝음이 없으면 깜깜한 밤중과 같은 것입니다. 눈을 감아 버리면 바로 깜깜한 밤중입니다. 무명을 깨달으면 본래 자리가 부처가 된다. 눈을 감았다가 떠버리면 온갖 것을 다 알잖아요. 그것이 바로 깨달은 부처의 자립니다.

눈을 감았다가 뜬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 감았을 때도 눈이요, 떠도 눈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았을 때와 떴을 때는 엄청나게 다르지요. 부처와 중생이 그와 같다는 겁니다. 중생에게도 그 마음이 있고 부처에게도 그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마음, 부처, 중생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가 다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감았던 눈을 뜨기만 하면 되는데.

일체가 다 마음에서 시작돼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유를 할 것 같으면 금반지, 금시계, 금목걸이와 같은 것이 처음에는 금광에서부터 나왔습니다. 금광의 금은 중생과 같습니다. 번뇌, 망상, 이 생각, 저 생각, 과거에 지은 팔만 사천 업장이 거기에는 다 섞여 있는 겁니다. 그것을 제련하고 달련해서 99% 금이 되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금과 같이 제련 기간을 거치면 금이 될 수 있겠지요.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하고 경을 보고 하는 것은 정신이 일치가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정신 일치하는 것이 곧 공부입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도 일심칭명하고, 화두를 할 때도 일념삼매, 일심삼매, 일행삼매, 한 생각 다른 잡념이 들어오지 않는 것.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칠일칠야, 일주일 밤낮 한 생각만 연속이 된다고 한다면 대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뭐꼬’ 한 생각만 있어야지 다른 생각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망상이 들어오면 안 되고 졸아도 안 됩니다.

물론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납니다. 간절한 신심과 대 분심과 대 원력과 대 의심이 없으면 화두 일심이 안 되죠. 기도하는 사람들도 법당에 앉아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도 생각은 아들 집에 갔다가 딸 집에 갔다하며 여러 생각이 일어난다면 법당에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생각이 딱 없어져서 100% 순금이 되는 상태가 공부입니다.

불교가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내 마음 닦는 것인데, 이 이상 쉬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눈이 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귀가 듣는 것이 아니잖아요. 입이 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 이것이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 몸뚱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이 우주를 조물주가 창조했다고 합니다. 조물주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인간의 마음에서 조물주가 나왔습니다.

마음이 떠나면 몸뚱이는 송장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있으니까 몸뚱이는 사람이지요. 죽었다는 것은 마음자리가 여기에서 떠났다는 겁니다. 내 몸뚱이도 마음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도 우주도 내 마음이 없으면 몸도 없고 우주도 없는 겁니다. 주관과 객관이 전부 다 마음에서 창조 된 것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 수라가 전부 마음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일체가 다 마음에서 지어졌다고 했던 것입니다. 마음자리, 이것이 우리의 근본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알아야 됩니다.

인간 몸 받았을 때 정진해야

옛날 당나라 때 구지 선사라는 분이 계셨어요. 어느 날 갓을 쓴 비구니 스님이 나타나서 선사 주위를 세 바퀴 돌고 가는 모습에 의문이 풀리지 않을 때 천룡 화상이 찾아왔습니다. 구지 선사가 비구니의 행동을 흉내 내자 천룡 화상이 내민 손가락을 보고 선사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구지 선사의 설법은 누가 법을 묻든지 간에 손가락 법문입니다.

그런데 구지 선사가 외출한 사이, 한 사미가 선사를 찾아오는 납자들에게 “우리 스님은 누가 오든지 손가락을 내미는 것밖에 없습니다”라며 손가락을 내미는 법문을 따라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사미를 불렀습니다. 아무개야. 네. 어떤 것이 도냐. 손가락을 내 놓는 겁니다. 그 때 그 손가락을 잡고 싹둑 잘라버렸습니다. 이 사미가 놀라서 울며 도망가는데 구지 선사가 아무개야 하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무개가 돌아봅니다. 그 때 구지 선사가 어떤 것이 도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손가락을 내어 놓는데 손가락이 없어진 데서 도를 깨쳤습니다. 그래서 구지 선사는 천룡 화상이 손가락을 내어 놓는 데서 도를 깨쳤고, 이 제자는 손가락이 없는 데서 도를 깨쳤다는 겁니다.

도라고 하는 것이 희한하잖아요. 있는 데도 깨치고 없는 데도 깨치니까요. 그래서 도는 있는 데 속하지도 않고 없는 데 속하지도 않으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교리를 보면 처음에는 삼라만상 전부 있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전부 있는 데 집착하거든요. 있다고 집착하니까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없다고 생각하니까 분명히 생로병사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 바로 중도의 이치입니다. 구지 선사의 깨침이라는 것, 상좌의 깨침이라는 것이 모두 진리와 부합되어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의식주 생활에도 바쁘겠지만 한번 죽게 되면 다시 인간의 몸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 지도 모르거든요. 육도 중생 가운데 인간 몸을 받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천국이 좋기는 하지만 즐거운 곳에만 있으면 공부할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잘 사는 사람이 절에 안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고락이 상반이라,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공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을 받더라도 정법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불교만큼 과학적인 종교가 없습니다. 유일신 종교는 계속 전쟁을 하고 싸워야 됩니다. 다른 신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계속 전쟁을 하는 겁니다. 불교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종교입니다.

인간의 몸을 받고 정법을 만난 여러분, 기도를 하든지 경을 보든지 참선을 하든지 간절한 노력으로 모두 대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5월 3일 울산 연화사(주지 덕륜)에서 봉행된 선지식 초청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원산 스님은

1964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 같은 해 사미계를, 1969년 월하 스님에게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97년 6월 교육원장 소임에서 물러난 스님은 1998년 2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통도사 백련암에서 3년동안 하루 한 끼만 공양하며 무문관 수행을 했다. 현재 스님은 최근 초산유원지 반대운동과 함께 영축산 남산 보존을 위한 천일기도를 봉행하고 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