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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칠피장 박 성 규

기자명 법보신문

근세에 끊긴 전통공예 맥 살린 명장

나전-구두제작 기술 접목
선조 칠피 기법 완벽 터득
초창기 문헌-유물거의없어
가죽위에 구두약 칠하기도

유물재현-전통작 선보여
사라진 칠기공예 되살려
신선미 투영한 현대작 심혈
후학양성·대중화 선도 역할

<사진설명>박성규 칠피장은 30여년 동안 전통공예 복원과 창작에 매진해 왔다.

가죽칠 공예라 할 수 있는 칠피(漆皮)는 아직도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진다. ‘가죽’이라 하면 구두나 장갑, 옷, 그리고 핸드백 등의 실용품만 떠올리게 될 뿐, 이 가죽이 때로는 옷장이 되고 서류함이 되며 보석 상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좀처럼 하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박성규 씨가 1990년대에 접어들며 옛 칠피 기술로 세간에 유물 재현과 전통 작품을 선보이기 전까지 우리의 칠피 공예가 존재했었는지 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었을 정도였다.

작품 대부분의 뼈대 즉 ‘백골’은 나무다. 조형된 나무 작품에 가죽을 붙여 옻칠을 한 후 이 위에 문양을 만들고 다시 옻칠을 한 후 광을 낸다. 마무리 단계인 장식을 달면 칠피 작품은 완성된다. 언뜻 간단해 보이지만 각 단계에서의 손길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칠피 공예는 보통 나전칠기와 곧잘 비교된다. 나전칠기 역시 제작과정의 기본 중 하나가 옻칠이기 때문이다. 나전칠기가 전복, 소라 등의 자연이 주는 화려함을 그대로 살렸다면 칠피 공예는 이와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부드러운 질감을 선사한다. 또한 나전칠기처럼 견고하면서도 나전보다 가볍다는 게 또 하나의 특징이다.

박성규 명장도 처음엔 나전일을 했다. 1953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 동네 이웃의 권유로 장롱공방에 취직했다.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의 우리 사회가 전쟁의 후유증으로 경제난에 허덕였던 당시였기에 시골 청년이 걸어야 할 길은 학업 보다는 취직이 먼저였다. ‘나전’일을 배워보겠다며 공방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그에게 돌아온 건 잔심부름과 청소 등의 허드렛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이 길을 들어선 이상 기본 기술이라도 배워보겠다는 심지 하나로 2년을 버텼다.

서울로 둥지를 옮긴 그는 종로와 도봉구 등지를 옮겨 가며 나전칠기 기술을 터득해 갔다, 그러나 그는 작업장에서 터득한 기술에 안주하지 않았다.

“작은 공방에서 배운 기술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좀 더 고차원적인 기술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지요.”

최고 장인 반열에 오르고자 했던 그는 옛 문헌을 뒤지고 박물관을 찾아다녔다. 그의 박물관 여정 길에 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가죽서류함이었다.

“세월에 바라진 서류함이었지만 그 속에 배인 원색이 눈에 선한 듯 했습니다. 어떻게 가죽을 이용해 그토록 세련된 문양과 색감을 탄생시킬 수 있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지요.”

가죽으로 만든 공예! 서류함은 아니지만 가죽 상자에 도전해 보았다. 하지만 남아있는 칠피공예작품도 거의 없거니와 이에 대한 문헌도 전무했다. 나전칠기와 제작 방법이 유사할 것이라고는 유추했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는 까마득했다. 실패의 연속은 자명한 일.

“제가 아는 벗의 형님이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구두도 가죽을 이용하니 가죽 구두 제작 과정에서 힌트를 찾으려 했는데 급기야 나무상자에 가죽을 붙이고 구두약을 칠하는 촌극까지 벌여 보았지요.”

가죽에 옻칠 하는 방법까지 알아냈으나 건조 과정에서 나무틀이 변형되기 일쑤였다.

“중도 포기요? 수십 번 생각했지요. 도통 제작 과정을 알 길이 없었거든요. 그래도 언젠가는 아니 이생에서는 이것 하나쯤은 알고 떠나겠지 하는 마음 하나로 다시 다잡곤 했습니다.”

가죽 제품이나 유물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단숨에 달려가 눈으로 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나전칠기와 구두공방의 가죽 다루는 기술을 접목해 가며 연구를 거듭해 갔다. 인고의 산물로 그는 가죽에 생옻칠을 반복하면 습기에 약한 가죽을 더욱 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가죽이 강한 듯 하지만 물 한 방울만 닿아도 얼룩져 버립니다. 그러니 습기에 약한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지요. 선조들이 그토록 많은 생활 가죽공예를 사용했음에도 지금까지 남아 있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솜씨 좋은 장인들은 절묘한 옻칠 기법을 통해 명작을 내놓았고 지금까지도 단 몇 점이지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겁니다.”

보물 747호로 지정된 칠피안장은 임진왜란 당시 최문병 의병장이 사용한 안장으로써 앞뒤 안교는 나무로 윤곽을 잡고 쇠로 고정시켜 형상을 만들고 고슴도치 가죽을 씌웠다. 전면은 골편으로 꽃모양을 오려 붙여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안장이 지금까지도 원형에 가까운채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옻칠 덕이었다.

그는 이러한 유물과 자신의 거듭된 제작기법을 실험하며 선조들이 가졌던 그 칠피공예 기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사진설명>버선장(연꽃문, 71X36X71cm).

가죽 즉, 원피를 적당한 크기로 재단한 후 디자인한 밑그림을 붙여 모양대로 잘라내거나 구멍을 내는 마름질 작업을 한다. 그 다음 초벌로 생옻칠을 하는데 이 단계에서도 가죽은 부드러운 가죽 특성을 갖는다. 견고성이 떨어진 가죽위에 옻칠과 찹쌀풀을 섞어 쑨 옻칠풀 작업을 하는데 이 작업은 보통 여덟 번 내지 아홉 번 정도 한다. 이 과정을 거친 후에야 가죽은 비로소 외유내강. 즉 겉으로는 부드러운 질감을 선보이지만 사실은 나무와도 같이 딱딱한 가죽이 된다. 방부, 방수도 이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완성된 가죽 위에는 디자인에 따라 장인의 멋내기 작업이 펼쳐진다. 작품에 따라 상감이나, 조각, 투각 등의 과정을 거친다. 다시 한 번 옻칠로 마무리하고 광내기 작업을 거치면 최종적인 칠피작품이 완성된다.

칠피 공예에 눈을 뜬 그는 소가죽은 물론, 양, 칠갑상어, 거북이 등 껍질 등의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며 옛 유물 재현과 창작품에 매진했다. 결국 그는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며 세인들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서독함부르크박물관에 소장된 ‘황칠문서함’을 비롯해 덕수궁유물전시관이 소장하고 있는 ‘인장함’,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류함’, 육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관복함’등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하며 그의 칠피공예는 우리나라의 전통 공예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고 노동부로부터 칠기명장에 선정됐다.

박 명장은 유물재현과 전통 작업에 매진하지만 신선한 감각을 가미한 현대작품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과기세트, 필통, 지통, 보석상자 등에는 칠피공예 대중화를 위한 그의 깊은 뜻이 스며 있다.

“지금도 저 작품들을 보고 칠피공예라 알아차리는 사람이 드물어요. 가죽이라 한참 설명해도 진짜 가죽 맞냐고 되물을 정도입니다. 당장 탁자나 장롱은 아니라 해도 우리 일상에서 쓰는 생활품에 초점을 맞춰 제작하고 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지요.”

<사진설명>최문병 의병장 안장.

칠피공예에 대한 대중 인지도가 낮음에 따라 이를 배워보려 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자칫 끊길 수도 있었던 칠피공예 맥을 어렵사리 이어 놓았지만 후학이 없다. 박 명장으로부터 기술을 전수 받은 제자가 몇 명 있기는 하지만 맥을 잇기에는 아직도 턱없이 모자란 숫자다.

그러나 칠피공예 제작 기법을 연구하면서 중도 포기 상태에서도 정진의 끈을 놓지 않았듯이 유능한 후학들도 많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 하나는 놓지 않고 있다.

“묵묵히 제 갈 길을 가야지요. 지금이 아니면 후대라도 누군가가 제 작품 보고 연구해 더 멋진 작품을 선보일 것입니다. 너무 조급해할 것도 없지요.”

“조급해할 것 없다” 하며 작업실로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배인 긴 여운이 느껴졌다. 그의 진가를 알고 일본에서 거액을 제시하며 모셔(?)가려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그였다. 그 이유는 ‘우리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칠피공예의 맥을 이을 인재는 분명 나올 것이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가죽에 옻칠 후 아름다운 무늬 새겨

칠피공예란?

<사진설명>박성규 作 관복함.

‘칠피’의 칠(漆)은 옻칠을 말하고, 피(皮)는 가죽을 말한다. 따라서 가죽칠을 뜻한다. 가죽칠 가공 기능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칠기 제작 기능 중의 하나이다. 가죽칠이라는 기본 제작과정에 다양한 문양과 그림 등의 디자인을 가죽위에 펼쳐 보임으로써 실용성에 예술적인 미감까지 더해졌기에 칠피공예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칠피’보다는 ‘피태(皮胎)’를 사용해야 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다. 우리 선조들이 남겨 놓은 칠기유물의 재료를 보면, 나무, 대나무, 금속, 종이, 삼, 가죽 등 다양한데 이 기본재료(胎)에 따라 그 이름을 각각 달리했다. 금속을 태로 한 것은 금태칠기, 종이를 태로 한 것은 지태칠기, 나무를 태로 한 것은 목태칠기 등으로 부르고 있기에 가죽을 태로 한 것은 ‘피태칠기(皮胎漆器)’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옻칠을 한 가죽은 물로 닦아도 무방하며 고열에도 잘 오므라들지 않는 특성을 갖는다. 조성중기 까지도 이 칠피공예는 이어졌지만 근세부터 그 자취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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