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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흥정이 어떤가요, 몸이여.

기자명 법보신문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지음 / 창작과 비평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 본다/…/미안하다/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니/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 뿐이다/…/어찌하랴/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룰 길 아득하다/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어떤가 몸이여(노숙,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에서)

언젠가 남편이 말하였습니다.

“이젠 늙나봐. 손이 늙어가잖아.”

그 뒤로 내 손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다른 여자들에 비해 집안일을 그리 하지 않아서 그나마 나는 아가씨손 그대로였는데 언제부터인지 보일 듯 말 듯 세월의 손금이 하나씩 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중국 베이징을 여행했을 때가 떠오릅니다. 이국의 낯선 거리를 차박차박 내 두 발로 밟아보고 싶어서 해가 뜨기 무섭게 거리로 나가 해질 때까지 이 골목 저 골목을 걸어 다녔습니다.

온종일 얼마나 쏘다녔던지 돌아올 즈음이면 무르팍에 불이라도 난 듯 화끈거렸고 그 열기와 통증은 종아리를 타고 내려가 두 발바닥을 지지곤 하였지요. 허름한 숙소로 돌아와 세숫대야에 찬 물을 담고 뜨겁게 달아오른 두 발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발바닥과 발등과 발가락 열 개를 하나하나 두 손으로 자꾸 문질렀는데 아, 정말 새삼스러웠습니다. 내 마음은 연신 ‘피곤해, 힘들어, 쉬었다 가자’라며 투덜거렸지만 그 마음을 싣고 온종일 노역을 하였던 이 두 발은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부림을 당하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습니다. 내 몸에게 고마움을 느낀 적은요. 정말로 두 발이 고마워 가만히 감싸 쥐었습니다.

평생 흥분 잘하는 감정과 따지기 좋아하는 이성과 풍선처럼 나돌아 다니기 좋아하는 마음을 담고 지내오느라 이 몸은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러고 보면 내가 평생 섬겨야 할 것은 마음이 아니라 이 몸일 것 같습니다. 마음은 천변만화 나를 속였지만 몸은 평생 나를 싣고 다니면서도 거짓말한 적 없었고 수다를 떤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제 일이 다 끝나면 누런 수의에 휘감기게 될 마른 몸뚱이….

그토록 제멋대로 부리던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어갔거늘 방종 맞은 독재자가 떠나버린 그 몸뚱이에게 마지막 자유마저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사람들은 수의로 꼭꼭 묶고 감싸고 또 감쌉니다. 게다가 비좁은 화덕에 밀어 넣고 불로 태워버리기까지 하지 않던가요.

그 긴 세월 자기를 담고 지내와 주어 고맙다며 이 마음이 절을 올리기도 전에 서둘러 재로 만들어 버리니 정말 이런 배은망덕을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노숙〉이란 시를 처음 만났을 때 가슴이 철렁하였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시인은 그나마 평생 부린 삯을 어떻게든 치러야 할 것 같아 속으로 가만히 셈을 해보았나 봅니다. 하지만 시인은 도저히 그 고마움을 갚을 길이 없어 차라리 자기가 떠나겠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몸에게 자유를 주겠다면서 의향을 묻는 시인에게 몸이 무어라 대답할지 궁금합니다.

정말, 어떠신가요, 몸이여? 

동국대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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