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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표 교수에 대한 반론 - “대승의 다신적 신앙, 불설과 모순”

기자명 홍사성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대승, 사상적 공헌 크지만 불교 왜곡-타락도 시켜
역사적 부처님 내세워 불설 가탁한 것은 부정직

본지 3월 13일자(647호) 5면에 게재됐던 김용표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의 특별기고문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경계한다’란 주장에 대해 「불교평론」 홍사성 주간이 이에 대한 반론을 보내왔다. 이를 전문 게재하며 반론이나 이견이 있을 경우 다음 호에 게재한다. (편집자)

김용표 교수의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경계한다’는 글은 대체로 세 가지 주장을 핵심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첫째,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다양한 시각의 통찰이 필요한데 초기불교에서만 그 근거를 찾으려는 것은 문제다. 둘째 대승불교는 깨달은 사람의 말을 불설로 인정하는 경전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승경전을 비불설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셋째 모든 종교현상은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승시대에 제시된 관음·정토·지장·미륵신앙을 정법주의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부처님’떠나면 거짓

김 교수의 이 같은 입론은 대승불교의 신앙적 교리적 정통성에 의문이 제기될 때마다 나온 반론을 요약한 것이어서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불교의 교리이해와 신행의 원천을 역사주의와 합리주의에 입각하는 초기불교보다 대승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유의할 대립각이다. 하지만 김 교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첫 번째 주장은 불교의 출발선과 정체성을 잘못 설정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다. 대승이든 소승이든 선이든 밀교든 석가모니라는 역사적 부처님의 존재를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

심지어 신불교를 표방하며 제작된 대승경전도 석가모니부처님을 등장시켜 그 입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설파한다. 이는 부처님에 근거하지 않는 불교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가 불교이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해서 설명되고 이해돼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다. 이를 문자주의라고 한다면 불설을 부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초해야한다는 생각을 법집(法執)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두 번째 대승경전 문제는 아무리 변명해도 논리가 궁색하다는 느낌이다. 대승의 경전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사상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또 그것은 매우 가치 있는 것임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사상 훌륭해도 위경은 위경

그렇지만 대승경전이 대승적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내가 체험한 깨달음은 이렇다’고 썼어야 옳다. 역사적 부처님을 내세워 불설을 가탁하는 것은 정직하지도 않고, 신앙상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더 큰 문제는 후대에 누가 또 경전을 만든다 해도 위경(僞經)이라고 말할 근거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인도에서 만든 것은 진경(眞經)이고 중국에서 만든 것은 위경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더구나 만들어진 것이 밝혀졌는데도 불설로 믿어야 한다는 것은 지성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경전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 내용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경전이 소설적 허구이거나 부처님이 가르친 내용과 상반될 때 그 가치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오시교판론은 경전성립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내세웠던 역설적 사건임을 상기할 일이다.

부처님 가르침과 ‘부합’이 관건

세 번째 대승불교의 잡다한 신앙을 종교사학적 안목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법을 결택하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종교사학적 관점은 종교현상에 대한 배경과 의미를 분석할 뿐이지 가치판단에는 중립적이다. 대승불교에 왜 유신교적 다불다보살 신앙이 생겨났는지만 ‘설명’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되냐 모순되냐 하는 질문에는 침묵한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 동안 무조건 ‘대승불교는 위대한 불교’라는 가위에 눌려 한번도 그 잘잘못을 따져보지 못했다. 그 사이에 무당이나 점쟁이까지, 유신론이나 다신론까지 불교라는 우산아래 들어왔다. 이런 터에 문제점을 덮어두고 종교현상학적 설명만 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로 기복신앙이 창궐하는 것도 이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무책임한 태도가 기복 창궐로

냉정히 살펴보면 대승불교는 사상적으로 위대한 공헌을 했지만 신앙적으로는 불교를 왜곡하고 타락시킨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측면도 많다. 따라서 오늘의 불교는 대승의 위대성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그 문제점을 제거하는데도 관심을 기울여야한다. 그래야 대승이 또 다른 외도라는 누명을 쓰지 않게 되고, 바른 신행도 가능해진다. 이것이 우리가 초기불교에 눈 돌려야 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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