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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일제시대 선학원 창설의 의미

기자명 법보신문

비구승 전통 ‘조선불교 청정성’ 보존 위한 자구책

재정권 장악한 대처승에 대항해 설립된 비구들의 총본산
왜색불교 배제로 총독부 견제…수좌대회에서‘선종’창종

<사진설명>일제시대 비구승들이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건립한 선학원 전경. 사진제공=조계종

선학원은 항일의식이 강하였던 비구승들이 중심이 되어 1921년 종로구 안국동에 건립된 사찰로서 우리 근현대 불교사에 큰 의미를 지니는 사찰이다.

식민지 시대에는 항일 승려들의 출입이 잦았고, 해방 이후 소위 ‘정화불사’가 전개될 때는 비구승들의 본산 역할을 하였다. 선학원이 일제의 불교정책에 반대하여 설립된 사찰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도 ‘모모사(某某寺)’라는 명칭 대신 막연하게 그냥 선학원이라는 일종의 위장 칭호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견해는 선학원이 1921년에 창설되었지만 3·1운동 이전부터 서울에서 포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던 많은 선사(禪師)들의 불교 선양의식과 일제의 사찰령에 대응하려는 발로에 의하여 창설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선학원 창설 주도 인물들은 1910년부터 시작된 ‘임제종 설립운동’의 주역들과 1920년 조선불교청년회의 주요 멤버들로 구성된 점을 들어 선학원이 항일 사찰로 기능하였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이 견해는 선학원 창설을 일제의 사찰정책에 대항하는 의식의 발로라는 것이다.

필자는 선학원이 항일의식이 강한 승려들의 주도로 설립되어졌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 사찰이 창건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정책 변화에서 찾아져야 된다고 본다.

선학원의 창립은 3·1운동 이후 일본의 통치정책이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되면서 각종 문화단체의 설립을 허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 무렵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었고, 『창조』·『폐허』와 같은 잡지의 발간도 이루어졌으며, 각종 문화단체의 설립을 허용한 분위기 속에서 설립인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선학원이 ‘원’이라고 명명된 것은 일제시대 불교를 규제하는 사찰령에 새로운 사찰을 창립할 수 있는 조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찰령이 시행된 후에 선학원 이외에 사찰이 창립된 사례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설사 ‘사(寺)’나 ‘암(庵)’이 아닌 ‘원’이라고 하더라도 식민지 통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학원은 항일의식이 강한 백용성·송만공·오성월 등이 설립 초기부터 관여하였지만 항일운동을 전개한 구체적인 사례는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학원을 불교계 항일운동의 중심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보다는 오히려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승려가 결혼하고 고기를 먹는 ‘대처식육’ 현상이 만연하고, 선풍(禪風)이 땅에 떨어졌을 때 비구승들이 계율을 지키고, 선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선학원 상량문에 나타난 창설 목적은 ‘불법을 전파하기가 지난한 시점에 정법을 널리 전하기 위함’이라고 나타나 있다. 선학원은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선우공제회라는 자치조직을 만들어 선풍 진작 활동을 시작한다.

선우공제회의 창립 목적은 진정한 수행자는 숫자가 적고, 비구승과 대처승이 뒤섞여 있어 구분을 하기 힘든 상황에서 비구승들의 처지는 날로 궁색해져서 자기 한 몸을 보전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런 까닭에 선우공제회는 비구 선승들이 출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함께 모여서 대책을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비구승들의 자구책 일환으로 만들어진 선우공제회는 세 차례나 총회를 개최하여 대안을 모색하였지만 결국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926년 범어사 포교소로 전환된다.

당시 불교계의 재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승려들은 본사 주지 계층인데 대부분 대처승들이었다. 이들은 처자식을 부양하여야 했기 때문에 비구 선승들에게 수행 공간과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데 인색하였다. 그런 까닭에 선승들은 청빈한 생활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승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자립의 활로를 개척하여 선(禪)을 발흥시키고, 중생을 고해에서 구하려는 원력을 세웠다.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재정난에 부딪힌 선학원은 1931년 1월에 김적음이라는 승려를 통하여 중흥의 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송만공의 제자로서 한의학에 능하여 침술과 약으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 그가 선학원을 인수하고, 큰 방을 거처로 해서 이탄옹을 입승으로 하여 참선을 시작케 하니 승려 및 신도는 20여명에 달했다. 3월 1일에는 선을 대중화하기 위해서 남녀선우회가 조직되었고, 회원 수는 약 70여명이었다.

부인선우회도 조직되었으며, 대중포교를 위해서 기관지 『선원禪苑』을 간행하였다. 이렇듯 선학원은 선의 대중화에 노력하면서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를 개최하여 내실을 기하고자 하였다.

수좌대회는 1931년, 34년, 35년, 39년 등 몇 차례에 걸쳐서 개최되었다. 선학원은 거듭되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1934년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전환된다.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은 1935년 3월 7일과 8일 2일 간에 걸쳐 개최된 제3차 수좌대회를 계기로 조선불교 선종(禪宗)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종헌에 규정된 각종 법안을 제정하고 종정, 종무원 간부, 선리참구원 이사, 수좌대표의원 등의 보직자를 선출하였다. 전국 수좌대회 개최 결과로 선종이 탄생한 것은 근대불교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사찰령 체제 하에서 30본산주지회의원에서 채택한 종명은 조선불교선교양종이기 때문이다.

본산 주지들은 제대로 된 종명을 채택하지 못하였는데 수좌대회에서 선종이라는 종명을 표방한 것은 구체적으로 선종의 어떤 종파를 내세우지 않았지만 조선불교의 연원이 선종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선종은 총독부와 결탁된 30본산 주지들의 회합체인 30본산연합사무소와는 성격을 달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실은 선종이 일본 불교에 동화되지 않고 독자성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항일의식의 표출로 볼 수 있어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8개조로 구성된 중앙선원청규는 제1조에 본원 납자는 무상출입(無常出入)을 금하고 매월 3일, 8일에 목욕을 하며 교외를 산보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제5조는 본 선원은 음주·식육·흡연·가요 등 일체 혼란을 금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처식육이 보편화 되어 있던 상황에서 청정 계율을 지키는 조선 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려 하였다는 것은 일본 불교에 동화되지 않고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비구승들이 계율을 지키고 조선불교의 선맥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은 총독부의 견제를 받았다.

<사진설명>선학원 자치단체인 선우공제회 취지서와 발기인 명단. 사진제공=조계종

총독부는 비구승들의 이러한 독자적인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음을 당시 언론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942년 8월 6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선리참구원은 법령상 사찰도 아니요, 포교상 아무런 존재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정당한 불교를 포교하는데 암적인 존재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지금 그 내용과 구성 인원 등 자세한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다. 조사가 끝나는 대로 이것도 통제될 단계에 이른 것만은 명확한 일이다’라고 하여 선리참구원을 통제를 할 빌미를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선리참구원이 자발적으로 친일행위에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제 시기 말까지도 전통 선풍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선리참구원은 중일전쟁 이후 재정난이 악화되면서 성격도 변화되어 총독부 정책에 협조하고, 31본사가 주축이 되어 구성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과도 협조체제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교무원에서 국방헌금을 모집할 때 선학원도 참여하였으며, 출정부대 송영식에도 참석하였고, 창씨개명령이 실시되자 선리참구원도 무료상담소를 운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 법인의 존립을 위해서는 거부할 수 없었던 사안이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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