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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기자명 법보신문

억불숭유 조선에 불교 뿌리내린 보살

조선시대의 불교를 일러 흔히 치마불교라 한다. 여인들, 특히 왕실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불교가 존속되어 왔음을 비하하는 말이다.

실제 조선 불교는 여인들의 치마폭에 담겨 들어와 치마폭에서 끝까지 지켜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이들은 왕의 어머니 혹은 왕의 부인 자격으로 조정의 불교탄압책에 맞섰고, 내탕금을 보시해 불상과 불화들을 제작하도록 했다.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조선시대 불교예술품들이 대부분 왕실의 화주로 이루어진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 중에서도 이들이 왕실과 불교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을 꼽는다면 바로 군왕의 어린 시절부터 불교를 조기교육 했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염불소리와 독경소리를 들으며 성장한 조선의 왕들은 부지불식간에 불교를 받아들였고,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성리학 일변도의 조선왕조에서 왕실여인들이 불교를 깊게 신앙한 것은 적어도 조선시대 불교가 생명력을 지탱하는 큰 버팀목이었다.

조선왕실에 처음으로 불교의 씨앗을 들여온 이는 신덕왕후 강씨였다. 그녀는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었지만 조선이 개국했을 당시 이미 첫 번째 부인 한씨가 죽은 뒤였기 때문에 경복궁에 입성한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이성계를 처음 만났을 때 신덕왕후 강씨는 열여섯 정도의 풋내 나는 귀족집안의 규수였다. 당시 이성계는 삼십대 중반을 훌쩍 넘어선 늙수그레한 함흥출신의 무장이었다. 당시 이성계는 수차례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군권을 장악하고 고려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반면 신덕왕후 강씨는 신돈이 처형될 당시 역적으로 몰려 정주로 내쫓긴 몰락한 귀족집안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만남은 고려 귀족사회로의 진입을 원하는 신흥 무장과 가문의 부활을 꿈꾸는 몰락한 귀족간의 정략결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의도야 어떻든 태조 이성계는 스무 살 연하의 젊은 부인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그녀는 젊고 예뻤으며 게다가 총명하기까지 했다. 개성 귀족집안 출신인 그녀는 귀족사회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편 이성계 도와 조선건국 기여

강씨는 친정집안의 탄탄한 인맥을 배경으로 이성계가 고려 귀족사회로 진입하는 통로를 마련했고 그녀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 덕에 이성계는 단번에 고려 귀족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씨가 낳은 아들들을 개성으로 불러들여 성균관에서 공부시켰으며, 개성의 명문귀족들과 사돈을 맺었다. 또 자신의 첫째 아들 방번을 공양왕의 사위로 만들 정도로 그녀의 로비 능력은 탁월했다.

신덕왕후가 죽었을 때 태조가 “내가 그렇게 고생하면서 나라를 세우던 날까지 오직 신덕왕후의 내조가 극진했다. 내가 왕위에 올라 만기(萬機)를 살필 때에도 또한 왕후의 도움이 컸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좋은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었으니 마치 보좌를 잃은 듯하다. 나는 너무나 슬프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이성계라는 한 남자의 삶에 있어서나 조선 건국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재였다.

신덕왕후 강씨의 집안은 불심이 돈독한 집안이었고 그녀 또한 독실한 신심을 가진 불자였다. 사랑하는 부인이 불교에 깊이 심취해있으니 남편 이성계도 자연히 그녀를 데리고 자주 절을 찾아 스님들의 법문을 즐겨 듣곤 했다.

이성계는 고려 말 성리학으로 무장된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런데 억불숭유정책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한 직후 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무학대사를 국사로 책봉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무학대사와 이성계간의 깊은 인연이 있기도 했지만, 국사 책봉의 배후에는 강씨의 입김이 있었다. 경복궁 내에 내불당이 들어선 것 또한 강씨의 발원에 의해서였다.

이성계도 강씨가 병이 들자 전국 명산대찰의 약사여래를 찾아 불사금을 바치고, 방방곡곡에 원당을 세워 왕후의 병이 낫기를 발원할 정도로 불교에 깊이 심취했다.

이성계는 신덕왕후의 말이라면 대부분 다 들어주었다. 첫 번째 부인인 한씨에게서 태어난 다섯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신덕왕후도 이것이 무리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태조의 첫 번째 부인 한씨 소생의 아들 중 방간과 방원을 개경에서 직접 키운 강씨는 그 중에서도 방원의 그릇이 특출하고 야심 또한 크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강씨는 방원이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어찌하여 내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매번 탄식했다.

태조를 독실한 불자로 만들어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핏줄이 조선의 왕통을 이어나가길 바랐다. 태조와 신하들이 세자를 정할 당시 한씨의 아들 중 세자를 정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강씨가 문밖에서 대성통곡을 하자, 이성계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덕왕후의 둘째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방석이 왕위에 오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와 이방원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가능하게 만든 양 날개와 같은 인물이다. 적어도 조선왕조가 개창하기 전까지 그들의 관계는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아주 깊은 것이었다.

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했을 당시 위험에 처한 신덕왕후를 모시고 어린 동생들을 업고서 피난을 떠난 이가 방원이었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방원은 말을 탈 때는 어린 동생들을 직접 안아서 태우고, 길이 험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직접 말을 이끌었으며, 양식이 모자랄 때는 길가의 민가에서 밥을 얻어다 먹이기까지 하였다. 또 정몽주 등 조선 건국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태조를 설득한 정치적 협력자 또한 신덕왕후와 이방원이었다.

하지만 신덕왕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위해 방원을 버렸다. 게다가 방원의 정치적 생명을 끊기 위해 그를 개국공신 명단에서 누락시켰고, 사병을 몰수했으며, 한때 방원과 함께 죽이려고까지 했던 정도전을 측근으로 끌어들였다.

방원이 신덕왕후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교육시키고 장가까지 들인 신덕왕후가 자신의 배로 나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자신을 배척한 순간 왕후는 더 이상 방원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조선왕조가 개창한 지 막 4년이 지난 1396년 8월, 갓 마흔에 불과했던 신덕왕후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뒤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이때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과 방석,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를 모조리 죽였다. 경순공주는 이후 비구니가 되었다.

강씨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아들들이 그토록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녀가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왕통을 이어가겠다는 욕망만 품지 않았어도 이성계와 신덕왕후, 그들의 아들딸 모두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욕망의 수레바퀴가 지닌 속성은 오직 죽음이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뿐 끝없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실패할 경우 설사 비참한 말로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꿈꾸는 바를 얻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 욕망! 이는 미혹중생이라면 누구나 짊어지고 있는 업보이자 숙명이다.

더구나 신덕왕후처럼 열정과 뛰어난 지략을 갖춘 인간일수록 그 수레바퀴의 회전속도는 더욱 빠를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신덕왕후의 돈독한 불심은 그 질긴 욕망의 고리를 끊지 못한 채 욕망에 편승한 현세구복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신덕왕후의 삶은 빛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조선왕조 최초의 국모, 남편의 한없는 사랑, 지혜와 결단력을 겸비한 성격은 그녀의 지위를 조선 최고의 여인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이상 그것이 되레 그녀의 삶을 몰락시킨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자신의 아들 위해 이방원 버려

후일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 의해 그녀는 왕후가 아닌 첩의 위치로까지 전락되었고, 공식적인 기념물과 기록에서도 모두 삭제되었다. 그녀의 무덤인 정릉은 사역의 규모가 축소되었다가 결국 도성 밖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부질없는 욕망의 끝은 언제나 비극일 수밖에 없다는 명제가 신덕왕후의 일생에서도 입증되고 있는 셈이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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