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선 스님]무생곡

기자명 법보신문

장맛비가 오락가락 주춤거리는 사이로 보름달이 떠오른다. 해맑은 모습이 먹구름 속에서도 얼굴을 바꾸지 않아 옛 도반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선실에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니 신묘하기 그지없어 달빛은 바야흐로 만상을 머금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청개구리 합창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고 마치 무생곡을 부르는 듯 다함이 없다.

달이 저렇게 둥글어서 달력을 바라보니 하안거 살림이 어느덧 반철로 접어들었다. 일대사에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사람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이 두렵기만 할 것이다. 어느덧 섣달 그믐날이 가까워지면 누구나 묵은 밥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발심했을 때 마음은 해가 갈수록 무뎌지고 몸은 늙고 병들어 가니 공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화두에 의정은 점점 희미해져서 젖은 나무에 불을 지피는 것처럼 화력이 없어 앉으면 혼침과 무기에 떨어지고 서면 산란심에 끄달려서 초조하기만 하다. 빈산에 달빛은 교교한데 소쩍새는 울고 크고 작은 무덤을 바라보면 참으로 무상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진실한 사람은 자기를 속이지 않기에 오히려 이러한 경계를 만나서 크게 한번 몸을 뒤집을 수가 있다. 달은 먹구름을 비켜가면서 마치 파도를 타듯이 서천으로 가고 있다. 오늘처럼 달이 좋은 날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얽힌 것들을 꺼내놓고 공부의 실마리를 풀어가기 좋은 날이다. 한 생각 번뇌가 일어나면 바로 돌이켜 마음을 확인하지 않고 끊어버리는 것을 공부로 삼으면 처음에는 편안할지 모르지만 갈수록 장마철에 습기가 많아서 집안이 눅눅하고 기분이 우울해 지는 것처럼 답답해진다. 또한 아는 것으로 규명해 들어간다면 서로 부딪치는 불기운 때문에 상기가 오르고 법망에 걸려서 시비가 끊어지지 않는다. 바야흐로 여름을 잘 보내려면 고요한데 치우쳐 너무 습해서도 안 되고 아는 것에 치우쳐 너무 덥지도 않아야 정혜가 등지되어 불기운은 아래로 내리고 물 기운은 위로 올라가서 서늘하게 보낼 수 있다.

바다 안개가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정으로 오르고 숲은 바람에 큰 파도처럼 일렁거리고 있다. 장마철이라고는 해도 그간 비가 많이 오지 않았는데 이제야 장대비가 쏟아진다. 마음은 소년처럼 온몸으로 비를 맞이하고 싶다. 비가 바다를 지나가지만 흔적이 없는 것처럼 천진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관음상 앞에는 수국이 향기를 안으로 감추고 푸짐한 다발로 수채화 물감을 풀어 먼 바다로 번지고 있다. 돌담 옆에는 하늘나리가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뒤뜰에는 치자꽃이 순백의 향기를 선실로 보내어 눅눅한 기운을 털어내고 있다.

모든 길이 끊어진 곳에 서 있는 한가로움 속에서 저마다 제 빛깔과 향기로 장마는 점점 깊어가고 있다.

거금도 금천 선원장 일선 스님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