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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홍원사 회주 동주 원명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조계종에 佛音 되살린 첫 어산어장

범패는 동양 최고의 종교음악이다. 천신들이 부처님께 음성공양을 올리기 위해 불렀다는 천상의 소리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의 ‘그레고리오 성가’가 서양을 대표하는 음악유산이라면 범패는 아마도 한국불교가 인류에 남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일 터였다.

범패는 다른 말로 어산(魚山)이라고 부른다. 어산은 조조의 아들 조식이 명상을 하다 물고기가 노니는 모습을 보고 음률을 만들어 그렇다는 설과 서기 830년 국내에 처음으로 범패를 들여 온 진감선사가 화동 쌍계사의 섬진강변에서 물고기가 유영하는 모습을 보고 창안했다는 구전이 함께 전한다.

이유야 어떻든 범패는 이승을 떠난 영가를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자비로운 마음을 담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불교의식의 총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범패에 이런 아름다운 상찬이 붙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일제의 침탈과 해방이라는 혼란기를 거치며 범패의 맥은 스러져 갔고, 설상가상 의식을 멀리하는 대신 활달한 선풍을 주창하는 조계종의 풍토에 범패는 설자리마저 잃어 버렸다. 범패의 존재가 이렇게 가물거리니, 그 선율을 알아먹는 ‘귀’ 또한 희귀해져 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였다.

그러나 범패는 1960년대 화려하게 부활했다. 서구로 음악 공부를 떠났던 유학생들에 의해 범패가 새로운 평가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학생들에 의해 우연찮게 서구에 소개된 범패는 그곳 음악 대가들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동양의 신비한 소리로 범패가 널리 소개된 것도 이 무렵이다.

지난해 10월 조계종 최초 어장에 추대된 홍원사 회주 동주 원명 스님은 이런 암울한 역사를 온 몸으로 견뎌온 역사의 산 증인이다. 꼬박 9년을 선방에서 화두와 씨름한 선승이면서도 잊혀가는 불교의식의 맥을 살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 말 그대로 불교의식 분야에 있어 최고 선지식이다.

4년만에 어산 전수

스님이 어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상좌가 ‘중질(?)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은사 대은 스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때는 1965년. 4년전 깎은 머리의 파릇한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 21세 무렵이었다.

“은사 스님은 교학에 밝은 대 강백이었습니다. 비구니 도량인 용인 화운사를 비롯해 서울에만 10여 곳의 사찰에서 강의를 할 만큼 인기가 있었지요. 그래, 저도 은사 스님을 좇아 교학 공부에 뜻을 두었습니다. 신심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지요.”

9년간 수행 후 佛音 깨우쳐

은사 스님의 당부도 있었지만 3~4개월이면 가능하지 싶었다. 어산의 기본은 상주권공. 재주 좋은 이들은 한철, 그러니까 석달이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터라 하루빨리 의식공부를 끝내고 교학의 세계에 몰입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스님과 어산의 만남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했다. 배움의 과정 또한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했다. 더구나 스님의 어산 스승은 당대 불교 의식의 최고봉인 송암 스님. 스승 남전과 제자 조주처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다.

“봉원사 노전방에 기거하며 매일 범패를 익혔습니다. 추석과 설, 초파일 ,백중을 제외하고 하루도 빼지 않았으니, 1년에 350일은 공부를 한 셈이지요. 대중 스님들이 숙소로 돌아간 늦은 저녁, 어스름한 봉원사 경내에서 홀로 적막을 벗 삼아 목이 터져라 소리 연습하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습니다.”

스승 송암 스님은 매일 아침 6시, 하루도 빼지 않고 원명 스님을 지도했다. 원명 스님의 타고난 재주도 재주지만, 변함없는 성실함에 송암 스님은 항상 흡족해 했다. 이런 까닭에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취재 요청이 들어오면 으레 원명 스님이 추천됐다. 원명 스님 또한 스승의 뜻을 먼저 헤아려 행동했으니 ‘입안의 혀’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일 터였다. 송암 스님은 한 달에 25일 이상을 여러 사찰을 돌며 재를 지냈다. 그리고 그때마다 동행 1순위는 애제자 원명이었다.

“어산은 혼자서 백번 하는 것보다 스승 앞에서 열번 하는 것이 낫고, 스승 앞에서 열 번 하는 것보다 사찰에서 실재로 한번 시연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백, 수천의 스님과 신도들의 눈보다 더 무서운 스승은 없지요.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릴 밖에요.”

배움에 꼬박 10년 걸린다는 어산을 스님은 정확히 4년 만에 끝냈다. 그야말로 속 성취. 그러나 들인 공력은 피와 땀을 더해 10년의 갑절이었다. 스님은 4년 만에 송암 스님의 심중에 있던 영산재, 예수재, 수륙재, 안채비, 짓소리 등 어산의 골수들을 모두 빨아들인 것이다.

“아마 1969년도 일 거예요. 배움의 과정이 끝나자 제가 선원으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마도 송암 스님은 큰 배신감을 느꼈을 거예요. 평생 곁에 있을 거라 의심 한번 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갑작스레 떠난다니, 충격을 받을 밖에요. 휑한 눈으로 한참 동안 먼 산만 바라보시더군요. 그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죄송해서 지금도 가슴이 아려 옵니다.”

그러나 스님은 잡지 않았다. ‘중이 공부하러 가는데 막을 수 있겠냐’는 말씀으로 서운함을 물리쳤다. 다만 앞으로 봉원사에 자주 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어산을 마치면 큰돈을 벌 수 있는데, 원명 스님이 자주 오면 그것을 못 잊어 다시 왔다는 비아냥거림을 받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제가 봉원사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아파 못 견딜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결심했지요. 성불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10년 동안 발길을 끊겠다고 말이지요.”

스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장 선방으로 향했다. 햇수로 꼬박 9년. 화두와 씨름하며 봉원사 근처로는 그림자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해제 때 간혹 스승의 안부를 묻기는 했지만 봉원사로 발길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결심도 결심이지만 스승에 대한 최대 존경의 표시였다.

“스님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 3년 지나면 다시 올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3년, 5년 세월이 가도 오지 않으니 ‘원명이 이놈 대단하네, 크게 성공 하겠어’하고 칭찬을 하셨다고 합니다.”

2005년 영산재 전수조교로 지정

스님의 치열한 화두 참구는 9년 만에 회향됐다. 은사 스님이 계시던 사자암의 주지 소임 때문에 부득이 방부를 거둬야 했다. 그러나 10년에 약간 못 미친 안거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입으로 배웠던 소리가 수행과 함께 푹 익어 몸 안에 녹아들었던 것이다.

“소리를 배울 때 규격에 맞는 정확한 음률에만 집중했어요. 허나 선방에서 치열하게 수행한 후 해제를 맞아 혼자서 저녁 늦게 도량을 돌며 소리를 해 보니 아, 이게 인간의 소리가 아니에요. 선정의 극치에서 나오는 소리란 말이지요. 삼매에 들어야 제대로 소리가 된다는 말이 이거였구나. 무릎을 쳤지요.”

스님은 내친김에 불교의식의 모든 것이 망라돼 있는『석문의범』에 몰두했다. 소리로, 몸으로 소리를 익혔다면 이제는 그 의미를 구슬 꿰듯 알고 싶었다. 아마도 신구의(身口意)로 어산을 익히고 싶었기 때문일 터였다.『석문의범』은 경율론 삼장에 조사의 어록까지 불교의 골수만을 추려놓은 엑기스였다.

“의식도 계행이 청정하고 수행력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또 의미를 옳게 새기지 못한다면 앵무새와 다를 바 없겠지요. 부처님께는 자비로 봐달라고 떼를 쓸 수 있어요. 그러나 영가에게 그럴 수 없습니다. 정확히 알고 해야 영가가 천도 되지 않겠어요.”

스님은 지난 2005년 국가로부터 영산재 전수조교로 지정받았다. 송암 스님의 상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문화재 지정이 늦어진 것은 여러 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은 세간의 평가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조계사 앞마당에서 3년에 걸쳐 영산재를 재현, 조계종의 불교의식 복원을 만천하에 널리 알렸다.

『승가의범』으로 의식 통일할 터

이런 눈물겨운 스님의 노력에 조계종도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16일, 조계종 태동 이후 처음으로 스님을 어장에 임명한 것이다. 어장은 조실, 방장, 강주, 율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불교의식 분야의 최고 어른이다. 그 자리에 평생을 거쳐 오롯이 불교의식의 맥을 이어 온 동주 원명 스님이 추대된 것이다.

스님은 최근 불교의식 복원을 위한 새로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승가의범』집필이 그것이다. 승가의범은 예불, 불공, 축원 등 불교의 각종 의식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으로 가히 현대판『석문의범』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01년 꼭 필요한 의식만을 간추려 발간했던『승가의범약술』은 행자교육원의 검인정 교재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14년간에 걸쳐『승가의범』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사찰마다, 또 스님들마다 의식에 대한 해석과 방법이 조금씩 다르니, 통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래서 수 십 번이나 교정하고 고치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올해 안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릴 생각입니다. 이에 따른 과오 또한 모두 저의 허물이겠지요.”

가뭄 끝 단비라고 했던가. 아마도『승가의범』의 발간은 사막처럼 황량한 불교의식 분야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은 청량한 산소가 될 터이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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