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통청 ③
삼보통청 ③
  • 법보신문
  • 승인 2007.07.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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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체삼보로서의 중생이 본래 삼보 자체
거불은 그 이치 깨닫기 위해 부르는 의식

나무 불타부중 광림 법회 (南無 佛陀部衆 光臨法會) / 나무 달마부중 광림법회 (南無 達摩部衆 光臨法會) / 나무 승가부중 광림법회 (南無 僧伽部衆 光臨法會). 보소청청진언:〈나무 보보제리 가리 다리 다타아다야〉

삼보통청은 거불(擧佛)의식으로 시작된다. 거불은 부처님을 비롯한 삼보를 받들어 청한다는 뜻이다. 알다시피 삼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배로 부처님인 불보와 가르침인 법보와 스님인 승보를 가리킨다. 불과 법과 승을 보배로 비유하는 까닭은 중생들의 모든 괴로움이 이 삼보를 통하여 비로소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삼보가 이 세상에 출현 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중생들은 생사의 긴 꿈에서 깨어날 수 없었고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 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보를 지칭 할 때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분이 설한 교법과 이 둘을 따르는 수행자의 무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삼보에! 대한 시각은 삼보를 인간의 한계와 역사의 과정 속에서만 해석 하려는 행위로 삼보에 대한 이해를 다 했다고 할 수 없다.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나 인간적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초역사적 초인간적 진실로 보는 화엄경과 같은 가르침에 의하면 삼보의 의미는 그 격을 달리한다.

화엄경에 의하면 불이란 석가모니가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부터 있어 왔던 우주적 진리이고 법은 만상의 차별된 갖가지 모습이고 승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체의 생명들이다. 여기에 불·법·승 삼보는 구별 지을 수 없다.

이를 동체 삼보라 한다. 우주적 진리와 만상의 차별된 모습과 일체 생명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차별된 만상에 동일한 진리가 숨어 있고 생명들이 곧 차별된 만상의 모습이니 삼보는 한 몸이며 한 모습이고 그 수효 또한 무수 무량하다. 일체 생명이 불 아님이 없고 법아님이 없으며 승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이 그렇다 해도 이 세상의 이치를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는 삼보가 삼보 일리 없다. 까닭에 그 이치를 중생들에게 깨닫게 하고자 우주적 진리인 부처님이 대비심을 일으키어 석가모니라는 몸을 가지고 세상에 출현하여 우주 삼라만상과 일체 생명의 근원의 이치를 설하고 수행하는 모습과 함께 청정한 교단을 이끄셨으니 이를 현전 삼보라 한다.

불교라는 종교가 일어나기 이전의 본래적이고 진리적인 삼보로써의 동체 삼보가 불교라는 종교로써 중생의 역사 속에 나타났으므로 현전 삼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현전 삼보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할 수 밖에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몸을 버리고 반열반에 드셨고 그분의 가르침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삼보는 어떻게 유지 되는가? 곧 불자들이 공경하는 불상과 경전과 스님들을 통해 유지 된다. 이를 주지 삼보라 한다. 동체 삼보와 현전삼보는 거룩한 부처님의 형상과 팔만사천 경전과 청정한 스님들인 이 주지 삼보를 통해 중생들에게 시현 되고 세상에 길이 보존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거불은 동체삼보로써의 중생이 자신이 본래 삼보 그 자체라는 이치를 깨닫기 위해 부르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가 삼보이면서도 이를 자각하지 못한 중생은 본래부터 존재해 왔던 동체삼보와 역사 속에 나타난 현전 삼보 그리고 지금의 신앙적 대상인 주지삼보에게 간절히 귀의함으로 해서 일체가 삼보와 더불어 차별이 없음을 깨닫는다.

〈나무 보보제리 가리다리 다타아다야〉하고 삼보를 두루 청하는 진언 속에는 수행자가 목숨까지라도 버려 어둠이 없는 광명의 삼종 삼보에게로 돌아가려는 강력한 원이 숨어 있다.
 
유마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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