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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화엄사 본사 승격에 얽힌 이야기

기자명 법보신문

전통 무시한 사찰령의 희생양…13년 노력 끝 승격

선암사보다 사격 높은 화엄사의 말사 등록에 공분
총독부를 적으로 인식 못하고 내부 분열로 치달아
집단 구타로 신임주지 사망…선암사·화엄사 갈등

<사진설명>1920년대 전남 구례 화엄사 전경 사진제공=민족사.

조선총독부는 1911년 6월 3일자로 사찰령을 발표하고 이어서 7월 8일 사찰령시행규칙을 공포함으로써 불교계를 30본사 체제로 확정지었다.

전국의 사찰 가운데 30개를 본사로 지정하고 나머지 사찰들을 행정구역의 편의에 따라 본사에 배속시켰다. 그런데 이 30본사 제도는 조선의 전통 사격을 엄밀하게 고려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예를 들면 기림사의 말사였던 불국사, 위봉사의 말사였던 금산사, 해인사의 말사였던 쌍계사 등의 사찰에서는 사찰령 시행 직후부터 본사 승격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모두 무산되었다. 하지만 선암사의 말사였던 화엄사만은 1924년 11월에 본사로 승격되었다. 그 저변에 어떤 일이 있었고, 내막은 어떠하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사찰령시행규칙에 의하면 화엄사는 선암사의 말사로 별격지로 분류되었다. 별격지란 말사 가운데 수반지 보다 격이 높은 본사와 거의 대등한 격을 지닌 사찰을 뜻한다. 선암사 초대 주지 방홍파는 1912년 1월 ‘선암사본말사법’의 인가 신청을 제출하였지만 총독부는 이를 유보하였다.

그 까닭은 화엄사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선암사 주지 장기림은 선암사의 사법을 인가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본산 승인 작업을 진행하였다. 선암사는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머물렀던 곳이고, 조선시대 1736년(영조 12)에는 승단의 최고직인 팔도도총섭인 약휴가 머물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는 사실 등을 들어 본사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맞선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이래 원효·의상·현중·홍경 등의 고승들이 머물렀던 곳이며, 나말여초에는 도선·동진 등 2명의 국사를 배출하였다는 점을 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부용 영관(靈觀)이 화엄사별원종주로서 법을 설하였고, 그 문하에서 서산·부휴가 배출됨으로써 조선 불교계 법맥의 중추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에는 팔도도총섭 벽암 각성이 머물면서 화엄사를 중수하여 효종과 숙종으로부터 대가람이라는 첩지를 받은 사찰이므로 선암사보다 격이 높으므로 말사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사찰령이 공포된 직후부터 본산 승격운동을 전개하여 총독부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총독부는 1912년 화엄사의 본산 승격 요청을 기각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화엄사는 각 본사 주지 앞으로 화엄사가 본사에서 제외된 것이 불합리하다는 건백서를 돌렸다. 당시 화엄사 주지 박포월은 진진응을 주지 대리로 임명하여 경성에 상주시키면서 총독부 당국에 수 차례 교섭을 진행하면서 보충 자료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본사 승격운동을 전개하였다. 총독부 내부에서도 의견이 대립되고 있었는데 사찰령을 입안한 와타나베 아키라(渡邊彰)는 화엄사의 본사 승격을 반대하였고,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은 찬성하고 있었다. 결국 총독부는 와타나베의 의견을 따라 화엄사의 본사 승격을 유보하면서 선암사를 본사로 승인하지도 않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였다.

총독부의 이러한 반응에 대하여 화엄사에서는 1917년 10월 주지 박포월과 정병헌·진진응의 이름으로 ‘지리산화엄사사격원유(智異山華嚴寺寺格原由)’라는 문서를 제출하여 화엄사의 연원과 사격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화엄사의 본사 승격 청원서를 기각하고, 1919년 8월 28일자로 선암사의 사법을 인가하였다. 이에 화엄사는 동년 9월 28일자로 주지 진진응의 이름으로 화엄사가 선암사의 말사가 되는 사안에 대하여 재고해 줄 것을 탄원하였다.

화엄사는 사찰령이 공포된 이후 선암사 사법이 인가되는 시기까지 5차례나 본사 승격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결국 성사를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 총독부는 1920년 11월 주지였던 진진응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선암사에서 추천한 김학산을 화엄사 주지로 인가하였다.

주지 인가를 받은 김학산은 1921년 1월 화엄사로 부임하는 과정에서 화엄사 승려들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하여 절명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당시의 상황을 『매일신보』는 이렇게 전한다. ‘사찰령이 시행된 이후 선암사는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격에 해당하는 화엄사를 말사로 편입하고 김학산이라는 선암사의 승려를 주지로 임명하여 재산인계 등 수속을 재촉하며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화엄사는 결코 무리한 요구에 굴하지 아니하고 극력 대항하는 과정에서 김학산을 사망케 하였다. 화엄사는 선암사의 간판이 걸리기 약 250년 전에 건립된 사찰로 선암사는 화엄사의 손자격에 해당하는 사찰이다’라고 보도하여 총독부의 방침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총독부에서는 사무관 오다 쇼고(小田省吾)를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오다는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총독부 학무국 편집과장과 고적조사과장을 거쳐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식민사학을 선도한 인물이다. 그는 1922년 2월에 「선암사·화엄사문제 조사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보고서에서 제시한 방안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두 사찰의 관계를 현행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선암사로 하여금 총독부에 사법개정을 요청하여 화암사를 선암사의 말사에서 제외시키는 것이다. 셋째는 총독부에서 이미 인가한 선암사의 사법을 취소하고 화엄사를 본사로 승격시키는 것이다. 세 가지 방안 가운데 둘째 방안이 총독부로서는 가장 무난한 것이었지만 선암사에서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측하고 그렇게 될 경우 세 번째 방안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총독부는 세 번째 방안을 취하기로 하고 두 사찰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총독부가 이처럼 신중을 기하였던 것은 당시 총무원과 교무원이 대립하여 갈등이 계속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혹시라고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내재되어있었다.

<사진설명>오다 쇼고(小田省吾)가 작성한 선암사와 화엄사의 분쟁에 대한 조사보고서. 이 문서는 극비로 분류되었으면 현재 정부기록보존소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돼 있다.

총독부로서는 화엄사의 본사 승격 문제가 화엄사만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나라 자칫하여 문제가 확산되면 30본사 체체가 송두리째 흔들릴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찰령 시행 초기부터 사격 문제로 이의를 제기한 사찰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극비리에 추진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총독부는 1924년 11월 화엄사를 본사로 승격시킴으로써 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화엄사의 본사 승격운동에서 많은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첫째는 총독부의 30본사 책정이 사격을 엄밀하게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총독부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강압 일변도로 사태를 무마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로 화엄사가 총독부의 부당한 처사에 항거하여 오랜 세월 동안 탄원서를 제출하고, 대표를 중앙으로 파견하여 상주하게 하면서 당국과 협의하는 등 줄기찬 노력의 결과로 본사로 승격된 것은 치하할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식민통치의 본산인 총독부와 연계를 형성하면서 민족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켜 소중한 인명을 절명케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범하였다. 이 과정에서 식민통치의 원흉인 총독부를 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민족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켜 화엄사의 위상 강화를 꾀한 것은 집단 이기주의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더구나 선암사의 장기림·김학산과 화엄사의 진진응은 1910년 임제종 설립운동 당시에는 함께 활약한 동지였다. 어제 동지가 오늘 자기가 소속된 사찰의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원수가 되어 대립하는 추한 모습을 보였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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