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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스님]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라

기자명 법보신문

장대비가 그치고 뒤뜰에 나가보니 자귀나무에 꽃이 피어 환하게 웃고 있다. 연분홍 꽃잎이 나비처럼 살포시 앉아있어 소박하고 수줍은 여인의 아취를 자아내고 있다. 옛 부터 가내 화합을 위하여 정원수로 심었으며 밖으로 나갔던 일체 생각을 거두어 자기로 돌아가라는 이름을 가졌으니 범상한 나무는 아닌 것 같다. 화사한 꽃의 자태는 구질구질한 날씨에 닫혔던 하늘이 열리는 듯 자귀의 하라고 법을 설하고 있다.

은사스님 문안을 드리기 위해서 오랜만에 출가본사를 찾았다. 고색창연한 일주문을 넘어서니 침계루는 흐르는 물에 두 다리를 걷어 올리고 안개 속에 조계산은 연꽃으로 피어오른다. 사자루에는 수련생들이 깊은 선정에 들었고 장마에 불어난 계곡물 소리는 지혜를 드러내니 여기가 정혜쌍수의 도량 조계총림이다. 오랜 전통 속에서 내려오는 수련법회는 하나의 가풍으로 자리를 잡았고 모든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화합 속에서 참여하고 있으니 깨침의 숲이 나날이 자라고 있다. 조계산정에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니 십여 년을 한철도 거르지 않고 수련회 지도법사로 지냈던 시절이 생경하게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수련생들을 선지식으로 삼아 수행을 점검하는 좋은 시절이었다. 너무나 엄하게 해서 선임하사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입에 미소가 흐른다. 후원으로 들어가 보니 자원 봉사자들이 묵언 속에 일하면서 공부를 챙기고 있었고 점심은 좋아하는 만두 공양이었다.

은사스님께서는 입제법문을 마치고 과로 하셨는지 누워 계신다. 하지만 사시가 되니 아픈 몸을 일으켜 불전에 나아가 예불을 드리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져서 다시 초발심으로 돌아간다. 이제 곧 장마가 끝나고 나면 피서를 떠날 것이다. 옛날에 어느 학인이 선사를 찾아와서 피서하는 법을 물었다. 이렇게 날이 푹푹 찌고 숨이 막히게 더울 때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선사는 덥거나 추위가 없는 곳으로 가라고 대답을 했다. 그곳이 어디냐고 다시 물으니 더울 때는 그대를 쪄죽이고 추울 때는 그대를 얼려서 죽인다고 했다. 밖으로 피서 떠날 곳을 찾아봐도 찾을 수 없어 일체 마음길이 끊어지고 은산철벽에 부딪쳐 덥다는 한 생각을 돌이키면 바로 청량한 세계가 드러난다.

선원에 돌아와 보니 텃밭에는 호박꽃이 활짝 피었다. 더위를 피하려고 하면 영원히 해결이 되지 않는다. 더울 때는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과 덥다는 한 생각을 놓치지 말고 끝가지 살펴서 쪄 죽을 정도로 숨이 꽉 막혀 온몸으로 하나가 되면 더운 줄 아는 성품에는 본래 덥고 추위가 없음을 요달할 것이다. 호박꽃은 소박하여 꾸밈이 없고 덥다는 분별이 없어 더위와 하나가 되어 삼복더위를 보내고 나면 가을에는 보름달처럼 둥근 본래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거금도 금천 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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