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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로 관조하는 수행이 선지식보다 낫다

기자명 법보신문

18. 돈오(頓悟)

<사진설명>조계 남화선사 조전 뒷편에는 혜능 스님이 주장자로 찍어 물길을 낸 탁석천이 있다. 순례단이 탁석천으로 들어가는 패방을 나서고 있다.
만약 스스로 깨달은 자는 밖으로 선지식을 가자하지 않음이니, 밖으로 선지식을 구해서 해탈하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다.

스스로 깨달은 자는 밖에 있는 선지식에게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여기서 가자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선지식은 다만 내 안의 선지식을 보기 위해서 도움을 주는 분이지, 전적으로 그분에게 도움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는 오랫동안 알았던 스님이 큰스님이 되면 ‘우리 스님’ 하면서 특별하게 그러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안의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함이니라.

거기에는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라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것이 해탈이고 자유입니다.

만약 자신의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이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줌이 있더라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야로서 관조하면 잠깐 사이에 망념이 없어질 것이며 이것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며 한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앎이니라.

반야로 관조하는 수행이 선지식보다 더 낫다는 말입니다. 육조 스님 당시에는 화두 드는 법이 없었고, 그당시 수행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반야로서 관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식을 만나서도 못 깨닫거든 반야로서 관조해보라고 했는데, 그러면 반야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요. 내가 실체가 없고 공이며 무아라는 것을 알고 보는 눈이 바로 반야입니다. 이것을 양변을 여읜 자리라고 합니다. ‘나다’ ‘너다’를 여읜 자리에서 보는 것이 반야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선지식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공부를 하려면 정견부터 갖추라고 합니다. 정견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바로 이해하고 보는 것인데,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연기라는 말로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연기로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공입니다. 반야심경에서도 오온이다 공이다 했습니다. 정견을 갖추어서 반야의 지혜로 비춰보고 체험하는 사람은 도인이고 부처입니다. 체험을 하지 못해도 이해를 하고 그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하면 그것이 수행입니다. 그래서 저는 육조 스님이 가르쳤던 수행방법을 복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복원해서 생활화하면서 염불·참선·봉사 중 하나를 하게되면 도인도 되고 수행자도 되어 정말로 행복하게 잘 살 것입니다.

제가 스님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 비교해도 부처님의 길은 정말로 위대한 길입니다. 깨치는 것은 상당히 어렵지만, 이해만 해도 굉장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귀한 줄 알면 모든 것의 가치를 알게되고, 그 가치를 사랑하게 되면 물질도 따라 옵니다. 모든 것은 다 인연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부자가 망하는 것도 인연인데 인연은 고정불변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내 마음 상태가 그것을 유지하느냐 더 발전시키느냐, 아니면 그것을 없애느냐 하는 것이 내 마음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고로 행복해지려는 인연의 마음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이 양변을 여의는 것입니다. ‘나다’‘너다’가 없는 것을 알게되면 그 사람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어떤 경우든 좋은 상태로 인연을 만들어 가는 능력이 거기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온이 개공이라는 본질만 알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성심지가 지혜로서 관조하여 내외가 명철하면 스스로 본심을 아는 것이고, 만약 본심을 알면 곧 해탈함이요, 이미 해탈을 얻으면 곧 이것이 반야삼매이며 이 반야삼매를 깨달으면 곧 그것이 무념이다.

자성심지는 오온이 개공이라는 그 자리입니다. 내외는 주관과 객관으로 보시면 되는데, 주관과 객관이 밝게 사무치면 연기현상이고 공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반야삼매라고 하니까 어렵게 느낄지 모르겠는데, ‘나다’‘너다’라는 양변을 여의는 것입니다. ‘나다’‘너다’ 하는 양변을 여의는 것은 곧 우리가 연기로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이고 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변을 여읜 그 자리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고 사는 것을 우리는 반야삼매라고 합니다.

무엇을 무념이라고 이름하는가. 무념이라는 법은 일체법을 보되 일체법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일체법에 두루하되 일체의 곳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항상 자성을 깨끗이 해서 육적(六賊)으로 하여금 육문(六門)을 달려나가 육진(六塵) 중에서 육진을 여의지도 아니하고 물들지도 아니하여 오고 가는데 자유하다.

연기현상은 어느 것은 그렇게 되고 어느 것은 그렇게 되지 않는 게 아니라 모든 존재가 다 연기현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성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오온이 개공 이라는 것을 알고 있듯이 내가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깨끗한 것입니다. ‘더럽다’‘깨끗하다’를 초월한 그 자리를 우리는 깨끗하다고 합니다. 육적은 아이비설신의를 말하고 육진은 안이비설신의의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법을 말하는데, 육진 중에 가더라도 더러운 것이니까 내가 섞이지 않아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여의지도 아니하고 물들지도 아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이 금 덩어리를 보았을 때, 금 덩어리를 탐을 내어 호주머니에 넣으면 물든 것이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을 공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 금 덩어리라는 것도 알면서 욕심을 내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돌보듯이 보면 물들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인이라고 하면 더러운 것도 안보고 나쁜 것도 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불자님들이 안보고 안 듣는 것이 도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다 보고 생각하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그것을 배척하지도 않는 것이 도입니다. 만일 여의고 배척하고 기피하고 그러면 우리가 생활 속에서 살지 말고 산꼭대기에 가서 혼자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활 속에 살면서 물들지 않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생활을 떠나서 불교를 찾는 것은 토끼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불교를 찾아야지 생활을 떠나서 불교를 찾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기 때문에 평등합니다.‘더럽다-깨끗하다’‘좋다-나쁘다’로 보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봐야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차별을 합니다. 차별하는 이유는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아는 그 자체가 여기서 우리 마음을 항상 깨끗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깨끗이 되고 나면 육적이 육문을 통과하여 육진을 보더라도 여의지도 아니하고 집착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유자재하는 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한다.

앞에서 무념을 설명할 때 염에서 염을 여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상을 설명할 때는 상에서 상을 여읜다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일체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무념행이라고 했습니다. 일체에 집착하지 않으려면 그 염이 실체가 없고 공이고 너다 나다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념행이 제대로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염에서 염을 여읜다고 합니다. ‘있다’ ‘없다’를 초월해서 생각하는 것, 그것을 생각에서 생각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행위하는 것을 무념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과 우리는 차이가 없어요. 있는 그대로 형상과 본질을 같이 볼 수 있으면 우리도 부처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그렇게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항상 생각을 끊지 말아라.

공이라고 하니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앞에서 공이라는 것이 본질이라고 했고,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있는 것도 아닌 것은 없다는 말이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보세요. (손을 들어보이며)본질을 보죠. 오온이 개공인 것을 봤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형상으로 만들어지는 요소가 뒤에 숨어 있잖아요. 뒤에 숨어서 같이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형상을 보게 되면 본질은 또 뒤에 가서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상을 보면서 본질을 보고, 본질을 보면서 형상을 보고 이렇게 보는 것이 정확하게 보는 것인데 우리는 한쪽만 보고 그게 다인 줄 알고 하나만 보고 있다고 집착을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다른 쪽을 보면 그것만 있다고 보고 다른 쪽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속박이 됩니다. 없다는 데에 속박되고 구속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속박이니 변견(邊見)이라고 이름한다.

변은 가장자리라는 뜻인데 즉 편견(偏見)입니다. 이 편견에 반대되는 말이 중도입니다. 중도로 봐야 하는데 우리는 한쪽에 치우쳐서 보고 있습니다.

무념법을 깨달은 사람은 만법이 다 통하며, 무념법을 깨달은 사람은 제불의 경계를 보며, 무념 돈법(頓法)을 깨달은 자는 부처의 지위에 이른다.

본질을 보면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 경계입니다. 돈(頓) 자를 넣은 이유는 이것을 보는데 백년이 걸리든 십 년이 걸리든 오십 년이 걸리든 보는 순간은 딱 한 순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법(頓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백년, 십 년 혹은 오십 년이 걸리든 그동안 본 것은 본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꿈속에서 본 것이나 같습니다. 보는 것은 한 순간에 무념을 보기 때문에 돈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질만 보면 우리가 다 부처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말은 쉬운데 그것이 어렵지요. 그래서 한 순간에 형상을 보면서 동시에 보는 사람을 상근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상근기 흉내를 내서는 안됩니다. 상근기 흉내를 내면 교만심만 생겨서 하근기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내 능력을 인정하고 『선요』에 나오듯이 숙맥(菽麥)도 모르고 노낭(奴郎)도 모르니까 정견부터 갖춰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정도입니다. 정견부터 갖춰서 부처님 법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발심해서 차근차근 가야 하는 것이지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 상근기 흉내만 내면 중간도 못 가고 저 밑으로 갑니다.

그러면 나중에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가치관을 바꾸어서 도를 향해 걸어가기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여기까지 온 분들이니까 그 정도는 돼야 합니다. 그래야 도인이 될 확률도 높아집니다. 돈을 해바라기 하면서 도닦는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가치관을 바꾸면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고 생활에 적극적이 됩니다. 지금의 세상은 더불어서 함께 잘 살아가야지, 혼자 잘 사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한 두 사람 참선 잘하는 것보다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라도 많은 사람이 함께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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