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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대응 일연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용서는 아픔 겪은 이가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행위”

전쟁만큼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공포, 굶주림, 생이별, 그리고 죽음…. 특히 임진왜란은 수백만 명의 민중이 무참히 죽었고, 약 10만여 명이 일본으로 끌려가는 생이별을 강요당해야 했던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참혹한 전란이다.

대응 일연(大應日延, 1589~1665) 스님은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았던 인물이다. 선조의 장남 임해군의 아들로 태어난 스님은 4세 때 임진왜란을 당해 함경도로 피난하던 도중 회령에서 아버지 임해군이 적진의 포로가 되면서 스님과 두 살 위의 누나도 함께 포로가 됐다. 비록 얼마 후 명과 왜군 사이에 강화가 이뤄지면서 임해군은 풀려났지만 이들 오누이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고국 조선으로의 귀환을 기다리던 스님은 결국 13세 때인 1601년 법성사에서 머리를 깎음으로써 왕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출가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16세에 교토 본국사에서 3년간 수학하고 다시 지바(千葉) 반고사에서 불법을 공부해 가관원(可觀院)이라는 당호 및 일연 상인(上人)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상인’은 고등교육과정을 마치고 인천(人天)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스님에게만 부여하는 칭호로 약관의 나이에 이미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행능력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1609년 조선에서는 아버지 임해군이 광해군에 의해 살해되고 귀환의 한 가닥 희망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하지만 스님은 절망하되 그 절망의 늪에서만 허덕이지 않았다. 오히려 수행과 교화에 더욱 매진했던 스님은 일련종 종찰인 탄생사 제18세를 역임하면서 일련종을 대표하는 인물로 교단을 이끌기도 했다. 또 만년에 이르러 어린 시절을 보냈던 후쿠오카로 돌아와 그곳 번주 구로다(黑田忠之)의 귀의를 받아 향정사 등을 건립하고 교화에 전념하기도 했다. 1660년에는 고국과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에 묘안사(妙安寺)를 창립하고 1665년 1월 26일 이곳에서 77년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동안 스님의 존재가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몇 해 전 원광대 양은용 교수에 의해 알려지게 됐습니다. 임금의 맏손자로서 어떻게 하다가 일본까지 가게 됐는지 자세한 정황이 궁금합니까?
“운명이랄 수밖에요. 워낙 어린 나이라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함경도 회령으로 피난 갔을 때 회령부 아전 중에 국경인이라는 이가 반란을 일으켜 우릴 붙잡은 뒤 가토 기요마사 장군에게 넘겼다고 들었소이다.”

▷임해군은 광해군의 친형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임금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실제 기록에도 명나라와 일부 대신들이 임해군을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보면 스님께서는 임금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그동안 절망과 아쉬움이 퍽 컸겠습니다.
“절망과 아쉬움보다는 이역만리 어린 자식을 떠나보내고 걱정했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오곤 했다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임해군께서는 성격이 난폭하고 여러 차례 왜장 가토에게 서신을 보내 내정을 탐사하려 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심지어 동생인 정원군을 협박해 군사비밀을 누설하던 첩자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동생인 광해군에 임금 자리를 넘겨야 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내 비록 어렸지만 아버님과 헤어지던 순간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소이다. 아버님께서는 나와 내 누님의 손을 꼭 쥐며 우리를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런 아버님께서 가토에게 동조했던 건 적진에 피붙이를 둔 열아홉 어린 아버지의 애달픈 선택 아니었겠소.”

▷성장하면서 일본에 대한 원망은 물론 조선에 대한 원망도 적지 않았겠습니다.
“당시는 정말 그랬다오. ‘내가 왜 남의 나라에서 살아야 하나’ 하는 분노와 절망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지요. 또 그런 세월이 날 오랫동안 견딜 수 없게 만들었소. 특히 훗날 아버님이 진도로 유배간 뒤 살해됐다는 말씀을 듣고는 목 놓아 울었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이 무너진 것도 있었지만 아버님의 삶이 너무나 기구하고 자식으로서 아버님께 짐만 됐다는 안타까움과 절망 때문이었지요.”

▷그럼 그것이 스님께서 어린 나이에 출가한 이유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무언가에 전념하지 않고서는 숨쉬기조차 힘들었으니까요. 불교를 만나면서 비로소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 거지요.”

▷스님께서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것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출가하고 3년 뒤에 수천 리 먼 길을 홀로 걸어 당시 일련종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던 교토 본국사(本國寺)에서 3년간 불교교리를 공부하고, 나중에는 지바(千葉) 반고사(飯高寺)에서 다시 또 다시 오랫동안 공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상인(上人)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으니까요.
“나는 고통으로부터 더 이상 달아나기를 멈추고 내면의 고통들과 대면하려 끊임없이 노력했소. 그리고 직면의 방법이 내겐 불교였고 기도였지요.”

▷마음공부를 하면서 변화된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번뇌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내가 어느 곳에 가든지 불행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소. 어떤 상황에서나 문제는 있기 마련 아니오? 내가 포로로 잡혀오지 않고 조선에 남았다고 생각해 보았소. 그러면 고통이 없었겠소? 그렇진 않을 거요. 왕위에 오르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을 테고, 그로 인해 형제들과 멀어지고 크게 다툴 수도 있었겠지요. 설령 왕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또는 신하들로부터 권위를 세우기 위해 늘 노심초사하지 않았겠소. 내 삼촌 광해군이 그러했듯 말이오. 불교는 내게 ‘무엇 때문에 불행하다’거나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야’라는 생각 대신 ‘지금 이 순간 평화롭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소.”

▷평범한 삶을 사람도 쉽지 않은데 그토록 큰 고통을 감내하며 살면서 그게 말씀처럼 가능할까요?
“평범한 삶은 없소이다. 누구나 지옥을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기에 이 세상이 사바세계라고 하지 않았소. 돌이켜보면 고통이 내겐 양약(良藥)이었지요. 내가 수없는 통곡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면 수행을 했을 리 없고 깊은 곳에 이르지도 못했겠지요.”

▷티베트불교에서는 처음 수행하는 이들에게 일부러 불필요한 고생이나 인생의 슬픔, 자기 내면과 바깥 세계의 투쟁을 하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인욕과 자비를 기를 토대, 더 큰 자유와 진정한 불성을 키울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고통에 대한 티베트인과 스님의 생각이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고통은 인간을 성장토록 하지요. 고난 속에서 키워낸 지혜와 자비와 용서는 비할 수 없는 보배라오.”

▷1631년 2월 일본불교사의 한 획을 그은 유명한 신지대론(身池對論) 사건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막부정권이 들어서면서 불교계가 정권과 타협해야 한다는 수정주의와 정권과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근본주의가 부딪칩니다. 이런 가운데 막부가 결국 수정주의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근본주의를 주장했던 스님들을 수도권에서 다 쫓겨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이 대론에 참가하라는 요구에도 불응했는데 이유가 있으십니까?
“논쟁을 통해 바람직한 결론에 이른다면 당연히 참가했지요. 허나 그 논쟁은 이미 뻔한 결론을 위한 요식적인 행위였고, 내가 거기에 들러리 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소. 내가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행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 아니겠소. 나는 그저 나 자신을 변화 시킬 수 있을 뿐이고, 내가 배운 지혜를 나눌 뿐이라오.”

▷이 사건 후 스님께서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후쿠오카로 돌아오셨는데 굳이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곳에는 내 유일한 피붙이인 누님이 살았소. 눈물로 나를 그리워하는 누님의 뜻을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들었지요. 조각가를 시켜 내 모습을 새기도록 했을 때 굳이 말리지 않았던 것도 누님의 외로움과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오.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그것을 황금 같은 기회로 만드는 것이 마음의 힘이오. 하지만 안타깝게도 누님은 외로움에 갇히고 짓눌려 그렇게 평생을 늙어갔지요.”

▷지난 2002년 10월 일본 후쿠오카 묘안사 주지 가도다 쇼에이 스님은 당시 누님이 제작한 스님의 존안상을 모시고 서울 종묘와 구리 선조대왕목릉 등을 찾았습니다. 또 금산사에서는 고국의 나무로 나머지 신체를 만들어 봉안하는 개안법회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감회가 새로우셨겠습니다.
“부처님에게 이 세상은 공(空) 속에서 일어나고 그 안에서 만물은 자비심으로 하나가 됐지요. 원망은 결국 집착과 기대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내 맘 속에 이기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오. 진리는 경전에 있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 있다오. 특히 용서란 상대방이 반드시 참회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픔을 겪은 측이 할 수 있는 참으로 거룩한 행위임을 알았으면 좋겠소.”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 양은용 「한국불교문화의 전통과 그 상징성」, 마츠오 겐지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 등

 

공경과 찬탄

“일연 스님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을 보여준 인물이다.” (원광대 양은용 교수)

“일연 스님은 온갖 절망과 좌절을 딛고 당당히 자신을 삶을 개척했던 위대한 고승으로 일본과 한국의 묵은 원한을 풀고 참다운 화해의 길을 열어 보인 분이다.”
 (일본 후쿠오카 묘각사 주지 가도다 쇼에이 스님)

“일연 스님은 일한우호(日韓友好)의 상징이다.” 
 (일본 아사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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