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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스님]이 일밖에 할 일이 없다

기자명 법보신문

만행 떠나기 전
힘 얻었는지 점검
천둥같은 선지식 말씀
“건강할 때 밀어붙여라”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에 계절은 속이지 못한다고 했는데 처서가 되니 밤이면 귀뚜리미가 울고 하늘의 별밭에는 은빛 잔치가 시작되었다. 가을의 문턱임에는 틀림이 없다. 해수욕장은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이른 아침 바다는 아직 남아있는 열정으로 집채만 한 파도로 굽이치고 있다.

앞마당에는 연꽃의 향기로운 잔치가 한창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연향에 취해보기는 처음이다. 해질녘 순백의 얼굴로 미풍에 하늘거리는 하얀 연꽃의 자태는 숨을 멈춰야 바로 볼 수가 있다. 저녁에는 고사리 손의 합장인양 다소곳이 아문 모습은 천진 동자의 해맑은 얼굴이다. 몇 해 전 선원의 상징화로 심었는데 지붕꼭대기에는 조각된 하얀 연꽃이 법성의 바다에 뿌리를 내린 탓으로 사시사철 시들지 않고 사람이 부처라는 법화경의 핵심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연꽃은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하여 깊고 그윽한 향기를 드러낸다. 사람도 시끄러운 세상에 살지만 누구나 부처를 품고 있어서 부처의 행을 실천하면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연꽃 만나고 지나가는 바람같이 걸림이 없고 머물지 않으면 그토록 질기고 미세하여 괴롭혀왔던 아뢰야의 무의식 창고도 바닥을 치고 습기는 다하여 땅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해제철이다. 해마다 이상 기온으로 덥고 비가 많이 와서 무사히 안거를 마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만행을 떠나기 전에 우선 먼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공부의 힘을 얻었는지 점검을 해야 할 것이다. 연꽃이 가지고 있는 덕중에 화과동시라는 말은 길가는 일이 곧 집안소식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뜻으로 만행 그대로 불과를 드러내는 일이어서 만나는 인연마다 불연을 심어 빛을 감추고 세상과 하나 되는 화광동진의 걸음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한철 죽어라고 정진을 해서 힘을 얻은 공부를 산철에도 끊어지지 않게 해야 되는데 산천구경에 팔려서 소홀이 하면 다시 잃어버리기 쉽다.

좋은 도반이 있어서 만행을 하면서 서로 경책을 할 수 있다면 오히려 경계 속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지만 도반을 잘못 만나면 얻어 놓은 공부마저 잃어버리게 되어 후회 막심할 일이니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정진력이 붙어서 대중생활이 번거로운 사람들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공부를 밀어붙이겠다는 생각에 토굴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다시 한 번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토굴 생활이 오히려 일이 많고 마장이 생겨서 참으로 대중이 고마운 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도 때를 놓치면 안 되듯이 이 공부도 젊고 건강할 때 밀어붙이지 않으면 참으로 어렵다고 경책하신 선지식의 말씀이 천둥소리로 다가 온다. 길을 가거나 오거나 오로지 한 세상 나지 않는 셈치고 목숨 걸고 모기가 쇠솥을 뚫듯이 한번 부딪쳐 볼일이다. 이 일 밖에 따로 할일이 없기 때문이다.

거금도 금천 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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