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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⑧

기자명 법보신문

악업에 실체가 없음을 깨닫지 못한게 불각

지난번에는 아라야식의 이의(二義) 중 불각의에 의한 염법연기 즉 삼세육추를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삼세육추로 물들여진 우리의 현실심을 어떻게 치유하여 심원(心源)의 자리에 되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에 관한 문제, 즉 아라야식의 이의 중 각의에 의한 정법연기를 검토할 차례이다.

각의(覺義)란 깨닫지 못한 데서 오는 허망한 생각을 여읜 것, 즉 본각을 의미한다. 이 본각에 의해 불각이 있는 것이며 또 불각에 의해 시각(始覺)이 있다고 하겠다. 시각이란 ‘비로소 깨달아 간다는 뜻’으로 우리가 불각심을 여의고 본각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시각의 네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앞서의 삼세육추가 세(細)에서 추()로 진행된 것과는 달리 이제 이 정법 연기에서는 추에서 세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거칠게 물든 마음을 차츰 차츰 제거하여 미세하게 물든 마음으로 나아가 종국에는 청정한 심원에까지 도달하게 하기 때문이다.

먼저 십신(十信) 정도의 사람은 앞서의 생각에 신(身)·구(口)의 일곱 가지 악(惡 : 살생, 도적질, 음행, 거짓말, 욕설, 이간질, 교묘히 꾸며대는 말)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 뒤에는 그 악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니 이를 불각(不覺)의 단계라 한다. 이 때 불각은 시각의 처음 단계로서 일곱 가지 악업이 나쁜 것임은 알았지만 아직 이 악업이 실체가 없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불각이라 하는 것이지 본각에 대한 불각의 의미와는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 십주(十住) 이상의 삼현(三賢) 보살 정도의 사람은 무명이 아집과 화합·계탁하여 생긴 아(我)와 아소(我所)가 공(空)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일으키는 여섯 가지, 탐(貪)·진(嗔)·치(癡)·만(慢)·의(疑)·견(見)의 근본 번뇌를 깨닫게 되어 이런 생각이 영구토록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역경계와 순경계를 분별하여 탐·진 등의 거친 집착상을 일으키는 것은 그쳤으나 아직 주객미분의 무분별의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으므로 이를 상사각(相似覺)이라 한다.

셋째 초지(初地) 이상 십지 정도의 사람은 앞서의 상사각에서 탐·진 등의 번뇌에서는 벗어났지만 아견(我見)·아치(我癡)·아애(我愛)·아만(我慢) 등의 인아집(人我執)과 법아집(法我執)에서는 해탈하지 못했다가 이제 이 수분각(隨分覺)에서는 무분별지와 상응하여 인·법집에서 벗어나게 된다. 무분별각은 얻었으나 아직도 무명업상·전상·현상의 미세념은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이를 수분각이라 한다. 마지막 네 번째 보살지를 다 수행해 마친 사람은 방편도를 완수하여 무간도에 이르러 마음이 처음이 일어나는 상(心初起相)을 깨달아 마음에 이 심초기상이 없어지게 된다. 즉 여기에서는 무명업상·전상·현상의 미세념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상주하니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앞의 세 단계에서는 깨달은 바가 있기는 하나 그 동념(動念)이 일어나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 이제 이 구경각 자리에서는 동념이 모두 없어지고 오직 일심만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초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앞의 세 단계에서는 심원에 아직 이르지 못하여 미세념이 다 없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오히려 무상하였으나 이 구경위에서는 무명이 완전히 없어지고 일심의 근원에 도달하여 다시는 동념을 일으키지 않으며 일심이 일여(一如)의 자리에 머물게 된다. 이 자리에서는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으므로 구경각이라 한 것이다.

시각의 마지막 단계인 구경각은 바로 본각과 일치하는데 이 구경각, 즉 본각에는 또한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지정상(智淨相)과 불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 먼저 지정상이란 진여법의 내훈(內勳)의 힘에 의해 자량을 수습·수행하여 초지 이상의 단계로부터 보살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무구지(無垢地)에 이르게 되며 이 무구지에서 방편을 만족하게 되면 미세념 내의 생멸상을 깨트리고 불생불멸의 본성을 나타내어 드디어 일심에 귀원하여 순정지(淳淨智)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둘째 불사의업상이란 순정하게 된 마음의 지력에 의해 일반 중생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한량없는 공덕상을 나타내는 것이니 끊임없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원효는 이 지정상을 자리(自利), 불사의업상을 이타(利他)에 배대하고 또 지정상을 무분별지, 불사의업상을 후득지 내지 후득지의 작용이라 보며 나아가 이들을 다시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관련시키고 있다. 지정상에 이르러 무분별지를 얻어 심원에 이른 사람은 불사의업상을 절로 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따라서 제대로 된 불사의업상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지정상 즉 근본무분별지를 먼저 갖추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 불사의업상이야 말로 원효가 늘 강조하는 부주열반(열반에 머물지 않음) 바로 그것이다. 성자(聖者) 혼자서 열반락을 누리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오, 중생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성인의 진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은정희 전 서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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