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 창설
29.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 창설
  • 법보신문
  • 승인 2007.08.3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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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 분열 때 무한정부 지원
1927년 학교서 첫 사랑 만나

성숙은 광동에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과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유학한국혁명청년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혁명운동』을 발행하면서 민족해방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한편, 북경에서부터 인연을 맺어 의열단 활동을 함께 했던 김원봉과 협의를 거쳐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1926년 성숙과 뜻을 함께 한 김원봉을 비롯해 의열단 단원 12명이 황포군관학교 4기로 입학해 민족해방운동에서 대중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군사이론 그리고 실전 등을 학습한 이후 10월에 졸업했고, 그동안 성숙과 김산(장지락)은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 졸업생들을 의열단에 가담시키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단원이 100명을 넘어서자 광주에 모여든 청년 활동가들을 정파와 출신에 관계없이 통합하는 유오한국혁명동지회를 조직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1926년 겨울 총회를 열어서 기존의 의열단 체제를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확대 개편했다. 이어 성숙의 주도하에 민족주의적 강령과 정책을 채택하고 김원봉을 당수로 추대했으며, 성숙 자신은 오성륜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해가 바뀌어 1927년 5월, 성숙은 정유린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조직인 광동촉성회를 설립했다. 광동촉성회 회원 170여명은 대부분 청년회와 의열단 구성원들이었고, 조선인들의 움직임은 어느 때보다 분주해졌다. 조선인 청년들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해진 것은 광동에서의 마지막 투쟁이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될지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초·중반의 광동은 중국의 정치노선을 결정짓는 혁명의 땅이었다. 중국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손문이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킨 이후 1917년 광동에서 정부를 세웠고, 이후 기존의 군벌들과 대립하면서 잠시 상해로 피했다가 19년에 다시 광동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세우는 한편 군대를 창설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충만했다. 이후 1925년 손문이 갑자기 병을 얻어 사망하자 국민당은 광동국민정부를 수립하고 26년에 장개석을 사령관으로 삼아 북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장개석이 군사 구테타를 일으켜 국민당 지도자들 가운데 좌파적 인사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국공합작은 깨지고, 급기야 국공대결이 전쟁양상을 띠고 있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장개석이 군사 구테타를 일으키기 전까지 벌어진 군벌 타도 북벌전쟁에서 한국인 의용병들은 용맹함과 뛰어난 통솔력으로 유명세를 탔고, 조선인 혁명가들은 6개월만에 양자강 유역까지 진군하는 동안 환희와 열광에 휩싸였다. 화북을 거쳐 그 힘을 그대로 갖고 한국으로 진군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뜨거웠고, 그 기쁨에 젖어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장개석이 지도하는 반혁명이 일어나 승리의 문턱에서 국공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그로 인해 중국의 혁명은 좌절되었고 한국, 러시아 등지의 혁명세력과 연대했던 혁명적 유대감도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조선인 활동가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고 광동에는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며 그 힘을 중국에서 얻고자 했던 마지막 조선 활동가들만이 남게 되었다. 이때 흩어진 한국인들과 광동에 있던 청년들은 장개석의 정권과 대립 관계에 선 무한정부로 달려갔다. 성숙 역시 이때 1개월 정도 무한을 다녀왔다.

이처럼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민족주의 사상을 견지하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져가던 성숙은 개인적으로 큰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1927년 여름부터 생애 처음으로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었던 것이다.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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