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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기자명 법보신문

단종 哀死 후 출가 …팔십 평생 비구니로 살아

왕위 찬탈한 세조가 남편과 아버지 죽여
왕비에서 노비로 전락…정업원으로 출가
영조, 비석 세워 위로…출가터 청룡사 복원

서울 동대문 밖 숭인동에는 동망봉(東望峰)이란 잘 알려지지 않은 봉우리가 있다. ‘동쪽을 멀리 바라본다’는 뜻의 이 이름에는 열여덟 어린 나이에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의 가슴 아린 사연이 깃들어 있다.

숙부의 정치적 야욕에 의해 왕위에서 내쫓기고 끝내 영월 땅에서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비운의 왕 단종. 그가 목이 졸린 채 동강에 버려졌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왕비가 팔십 평생을 한 많은 영월 땅을 바라보며 통곡한 자리가 바로 동망봉이다.

동망봉에서 대학로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려오면 나오는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와, 동망봉 아래 지금의 보우불교대학 뒤편에 있는 빨래터, 그리고 정업원 옛터에 들어선 청룡사는 모두 정순왕후의 눈물 어린 역사가 배어있는 유적들이다. 제대로 한번 피어보지도 못한 채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긴 어린 왕과 왕비의 이야기는 당시를 지켜보았던 민초들에 의해 산천의 이름이 되었고, 후대인들에게는 아련한 전설이 되었다.
 
젊은 나이로 문종이 요절하자 그의 열두 살 난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1453년 정순왕후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만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왕비에 간택됐다. 이듬해 열다섯의 나이로 조선의 국모가 된 그녀에게는 시부모는커녕 수렴청정을 해줄만한 시할머니조차 없었다. 열네 살의 어린 왕과 열다섯 살 난 왕비가 의지할 수 있는 피붙이는 수양대군을 비롯해 열여덟 명이나 되는 야심만만한 숙부들뿐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야욕이 강한 숙부들은 어린 왕에게 의지처이기보다는 위협적인 존재였고, 단종의 신세는 말 그대로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천애고아(天涯孤兒)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세자를 두고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던 문종은 황보인과 김종서 등에게 어린 왕을 잘 보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황보인과 김종서를 중심으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 출신의 신하들이 왕을 보필하는 신권정치체제가 구축되었다. 자연히 왕실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김종서와 황보인의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커졌다.

태종과 세종대를 거치면서 왕권중심의 국가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성장한 세종의 아들들에게 이 같은 신권중심의 국가체제 전환은 종묘사직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특히 세종의 아들 중에서도 재주와 지략이 특출했던 수양대군은 단종의 치세기간 동안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이 힘겹게 쌓아올린 조선왕조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수양대군은 자신이 직접 왕이 되기로 결심했다.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자신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던 금성대군을 비롯해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을 연달아 귀양을 보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양위한 후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 살았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이 골육상쟁(骨肉相爭)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하지만 곧이어 성삼문과 박팽년 등 훗날 사육신으로 불리게 된 이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조는 주동자들의 9족을 멸하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해 영월 청령포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그해 9월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하자 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부득이 자신의 친동생 금성대군과 조카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세조의 오랜 친구인 정순왕후의 아버지 여량부원군 송현수도 이 역모를 함께 도모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서 초막을 짓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당할 때 왕비는 남편을 따라 가지 못하고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이때 단종과 왕비가 눈물로 이별을 고했던 청계천의 다리는 ‘영이별다리’로 불리다가 후일 영도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궁에서 쫓겨난 왕비는 끼니를 연명할 꺼리가 없어 걸식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 때 유본예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정순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때마다 푸성귀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자 왕비가 살고 있는 초막 근처에 여자들만 드나드는 시장을 열어 물건을 사는 척 모여들어서는 왕비에게 먹꺼리를 가져다주는 ‘금남(禁男)의 시장’이 동대문 밖에 들어섰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남편이 영월에서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왕비는 자신이 살고 있던 초막에서 가장 가까운 봉우리에 올라가 멀리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 단종의 죽음은 정순왕후의 단 한 가닥 남은 희망이 완전히 소멸되었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녀의 신분이 일국의 국모에서 노비 신세로 전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역적 죄인이 되었으니 그녀의 신분도 관의 노비로 전락했다. 관노비는 원래 관청에 소속돼 노역을 담당해야 했지만 그녀에게 노역까지 시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왕비는 단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정업원의 비구니가 되었다. 일부 기록에는 그녀가 도성 밖으로 쫓겨나면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지만 전후 상황으로 볼 때 그녀가 비구니가 된 시점은 단종이 죽은 직후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비록 귀양을 간 상태였다 하더라도 단종이 살아있는 한 남편과 다시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상당히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1918년 김택영이 쓴 『한사경』에 의하면 정순왕후의 미모에 반했던 신숙주가 세조에게 정순왕후를 첩으로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비록 관노의 신분으로까지 추락했다고는 하지만 일국의 국모를, 그것도 자신의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한 철천지원수가 자신을 첩으로 달라고 청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순왕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녀가 비구니가 된 이유는 물론 벼랑 끝으로 몰린 자신의 처지를 부처님의 가피 속에서 위로받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비구니가 되어 탈속의 길을 가는 것이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은신처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택영의 『한사경』이 20세기 초에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신숙주가 정말 정순왕후를 자신의 첩으로 달라고 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단종이 죽은 지 300년이 지나도록 이런 이야기가 민중들 사이에서 구전돼왔다는 사실은 왕조가 망하는 그 순간까지 조선의 민중들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부정하고 어린 나이에 요절한 단종과 그를 평생 그리며 살다간 정순왕후를 조선왕조의 진정한 왕과 왕비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정업원의 비구니가 된 후에도 정순왕후는 왕실에서 데리고 나온 시녀 셋과 함께 염색하는 일을 하며 살아갔다. 일설에는 그녀가 정희왕후의 배려로 그다지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아갔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기록에는 그녀가 세조의 도움 받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평생 염색물을 들이는 일을 하며 살아갔다고 전해진다. 현재 보우승가대학 뒤편에 남아있는 자줏골 빨래터가 바로 그곳이다. 정순왕후의 일화가 얽힌 유적들이 지금까지 동대문 인근 곳곳에 남아있다는 점 또한 그녀가 지킨 절개에 대한 민초들의 찬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200여년이 흐른 뒤, 지난날의 일을 들은 영조는 왕비가 오르던 그 봉우리에 동망봉이라는 세 글자를 새기고, 그녀가 밤낮으로 불공으로 들이던 절터에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씨를 써서 비석을 세우게 했다.

정순왕후는 여든두 살까지 살다가 1521년(중종 16)에 세상을 떠났다. 열여덟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남은 60여년의 삶을 동망봉에서 통곡으로 채운 그녀에게 어느 누가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동망봉 자락에 올라 여든의 나이로 열일곱 어린 남편을 그리던 그녀의 마음에는 무엇이 피어나고 있었을까. 정순왕후가 버텨나간 인생은 삶이 아니라 차라리 무덤이었으리라.

그 황량한 무덤 위에서 정순왕후가 불보살에 의지해 스스로를 지켜낸 고통의 자리에는 오늘날 청룡사라는 절이 들어섰다. 이곳은 절이기에 앞서 조선 여인들의 한 많은 삶을 지탱시켜준 불심이 남긴 흔적이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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