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항일비밀결사 만당의 결성과 활동
31 항일비밀결사 만당의 결성과 활동
  • 법보신문
  • 승인 2007.09.1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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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저항했던 불교계 대표 비밀 결사단체
<사진설명>항일비밀결사 만당의 주역들 뒷줄 우측 두 번째가 최범술·김법린·허영호. 앞줄 우측 첫 번째가 김상호이고, 네 번째가 강유문이다.

일제시대 불교계 개혁의 선봉은 청년 승려들이었다. 청년 승려들은 1920년부터 조선불교청년회를 결성하여 교계 개혁 활동을 전개하였고, 1921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의 행동대격인 조선불교유신회가 주축이 되어 사찰령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유학파 불교청년들 결성

1924년경에 이르러 활동이 침체되었던 조선불교청년회는 1928년 초에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청년 승려들을 중심으로 재기한다. 불교계의 항일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만당(卍黨) 또한 불교청년운동의 일환이었다. 만당은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구체적인 조직체계와 활동 상황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38년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됨으로 인해서 그 모습이 드러났고, 해방 이후 이용조·최범술·김법린·박영희 등의 주요 인물들의 회고담을 통하여 윤곽 파악이 가능하다. 해방 이후 생존자들의 회고에 입각해서 만당의 실체를 살펴본다.

1964년 8월 30일자 『대한불교』에 실린‘내가 아는 만자당(卍字黨) 사건’이란 이용조의 기고문에 따르면 결성 배경은 이렇다. 1929년 4월 무렵 그는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당시 경성제국대학 병원 내과에서 연구생활을 할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서무과장으로 재직하던 조학유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이 하숙집에 김법린·김상호와 같은 승려들의 출입이 잦았다고 한다. 이들은 불교계가 주지 중심으로 운영되고, 31본사 주지들이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이사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항일의식이 강하였던 이들은 이 시기 총독부에서 인정하는 표면단체의 활동으로는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이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 순교정신에 입각하여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가 만당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만당의 주요 구성원은 총 24명이지만 전체 당원은 80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중앙에 본부를 두고 주요 지방에 지부를 두었으며, 동경에 특수 지구를 두었다고 한다. 초기 만당의 결성은 3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930년 5월 경 조학유·김상호·김법린·이용조 등의 1차 결사가 있었고, 이들의 검증을 거쳐 2차로 입당한 승려는 조은택·박창두·강재호·최봉수였으며, 3차로 박영희·박윤진·강유문·박근섭·한성훈·김해윤 등이 합류하였다.

독립 위해 목숨 바칠 것 서약

이름이 밝혀진 당원을 살펴보면 서원출·장도환·허영호·정상진·차상명·민동선·최범술·정맹일·이강길·김경홍 등이다. 24명 가운데 15명이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김법린은 프랑스에 유학한 경력이 있다. 5명이 3·1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으며, 나머지는 신식학교를 다녔거나 불교청년회의 구성원이었다. 만당 멤버들은 외국 유학을 다녀왔거나 신식학교를 다닌 신진 엘리트층으로 현실을 보는 눈이 날카롭고 개혁 의지가 강하였다.

입당 절차는 먼저 당원 중에서 후보자를 추천하면 모든 당원들이 일정 기간 동안 여러 방면으로 그 사람의 과거 경력과 현재의 사상 동향 등을 비밀리에 시험한 후에 전원이 찬성하여야 입당이 허용되었다.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당원은‘비밀엄수’·‘당의절대복종’를 서약해야 하였으며, 만일 비밀을 누설하였을 경우에는 생명을 바치기로 하였다. 만당의 성격은 선언문과 강령에 잘 나타난다.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라! 이천년 법성(法城)이 허물어져가는 꼴을 들으라! 이천만 동포가 헐떡이는 소리를!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의분에서 감연히 일어선다.

이 법성을 지키기 위하여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향자(向者)는 동지요
배자(背者)는 마권(魔眷)이다.
우리는 안으로 교정(敎政)을 확립하고
밖으로 대중불교를 건설하기 위하여 신명을 도(睹)하고 과감히 전진할 것을 선언한다.”

이 선언문에 나타난 만당의 창당 목적은 정법을 지키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청년 승려들이 단결하여 일어선다는 것이다, 이 선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 불교계와 조선의 암담한 현실과 이를 타개하려는 청년 승려들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은 실천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강령을 제시하였다.

하나, 정교분립
둘, 교정확립
셋, 불교대중화

청년 승려들은 정교분리가 이루어져야 교정을 확립할 수 있고, 그를 통하여 불교 대중화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강령에는 일제가 불교계를 통제하기 위하여 시행하고 있는 사찰령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1929년 불교계의 총의를 모아 제정된 종헌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청년 승려들은 서로 간에 연락을 긴밀히 하고, 단결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하였다. 당원들은 한용운을 당수로 추대하고, 주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문을 구하였으나 정작 본인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후일 조직이 탄로 났을 때 한용운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만당의 활동은 비밀항일결사이지만 일제시대 전체적인 불교계 청년운동의 범주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구성원들이 모두 청년운동의 멤버들이고, 추구하는 것이 불교계 개혁이기 때문이다. 불교계 청년운동의 지향점은 교계의 개혁이었으며. 그것은 독립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무리 비밀결사라고 하더라도 이 시기에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 시기는 일본이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한 준비 작업을 하던 때였으므로 주의를 요하는 조선인에 대한 감시와 경계가 삼엄하였기 때문에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진설명>1931년 3월 22일에 개최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창립대회 기념사진. 사진제공=민족사.

만당의 주요 당원들은 1931년 3월 조선불교청년회 임시총회를 계기로 탄생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주축 세력이 되었다. 총동맹의 성립은 당시 지역별로 성립된 불교청년회 지회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중앙에 일원적인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총동맹의 강령은 ‘불타정신의 체험’·‘합리적인 종정의 확립’·‘대중불교의 실현’으로 만당의 강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총동맹은 기관지 『불청운동』을 간행하면서 종헌의 실행, 강원과 선원(禪院)교육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총동맹의 활동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시체제가 강화되자 ‘시국선처(時局善處)에 관한 주의 환기 격려문’을 회원들에게 발송함으로써 일제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당은 1933년에 들어와 최범술이 총동맹중앙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내부 갈등으로 해체된다. 해체의 원인은 당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천도교단으로부터 보성중학교를 인수하여 경영하고 있었는데 이 문제를 둘러싸고 구성원들 사이에 내분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보성중학교 교직원들 사이에는 종교적인 문제로 갈등이 야기되고 있었고, 학내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31본사 주지회의에서는 보성중학 문제를 전문학교로 승격시키기로 하고 40만원을 증자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당시 중앙불전 교수였던 허영호는 재단법인의 기금을 100만원으로 늘여야 하는 필요성에 대한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 사안에 대하여 같은 만당 당원이던 정상진은 반대 의견을 교계 언론에 발표하였다. 두 사람의 갈등은 봉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최범술은 이러한 상황에서 비밀결사를 지속시키기는 많은 부담이 따른다고 판단하고 만당의 해소를 제의하였다. 당원들의 의견은 찬반으로 나뉘었으나 결국 해산하기로 합의하였다.

태평양 전쟁 후 친일 전향도

1938년 주변 인물의 제보로 만당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김법린·장도환·최범술·박근섭 등이 피체되어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 까닭에 모두 방면되었는데 이들은 ‘당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한결같이 이미 세상을 떠난 조학유라고 함으로써 한용운은 검거를 면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만당의 당원들마저도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친일로 전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제 치하에서 불타의 정법을 전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순교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결성되었던 만당의 구성원들이 친일로 전향할 만큼 일제 말기의 사회 상황은 살벌하였다. 어려운 때 지조를 지키면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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