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을 갖추고 도를 닦으면 그 자체가 복
정견을 갖추고 도를 닦으면 그 자체가 복
  • 법보신문
  • 승인 2007.09.1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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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멸죄(滅罪)

<사진설명>조계종 중앙신도회 중국선종사찰순례단이 혜능 스님의 출생지인 국은사로 들어서고 있다.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달으면 삿된 것은 제해지고 바른 것을 행함에 죄가 없다.

삿된 것은 ‘있다’‘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복을 닦으면 죄 지음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삿된 것을 없애고 옳은 것만 자꾸 행하면 행해가는 자체가 수행이고 복을 짓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행하는 거기에는 죄가 없습니다. 업(業)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있다’‘없다’로 생각하고 사고하고 행동하면 그것이 업입니다. 그러면 내가 실체가 없고 공이고 무아라는 것을 아는 그날부터는 어떤 행위를 짓던지 그것은 업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능히 스스로 보면 깨달은 사람과 더불어 동일하게 나란히 한다. 대사가 이 돈교(頓敎)를 전해가지고 배우는 사람이 함께 일체가 되기를 원하니라.

육조 스님이 돈교법을 전하면서 배우는 사람들이 자기와 한 몸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 깨달았든 못 깨달았든 육조 스님이나 우리나 손톱만큼도 틀린 것 없이 똑같습니다. 우리는 본질을 못 봐서 착각에 빠져 있을 뿐이고, 그분은 본질을 봐서 정상적인 사고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장차 본신을 찾고자 할진대는 삼독 악연을 마음 가운데 세탁할 지니라.

제가 한동안 본질 그 자리는 세탁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송광사 강원에서 『선요』를 강의한 것이 대중법회에 나온 시초인데, 그때는 세탁기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우리가 본질을 보고 이해만 하더라도 세탁기 역할을 합니다. ‘나다’‘너다’라는 생각이나 ‘좋다’‘나쁘다’는 생각을 세탁해 버립니다. 그래서 세탁한 눈으로 보고 세탁한 생각으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해도 못하니까 세탁기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좋은 세탁기를 갖고서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본질을 이해하면 세탁기 역할을 해서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소양을 갖춰서 활발하게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노력해서 도를 닦아 유유히 지내지 말 지어다. 홀연히 헛되게 일생을 마치니, 만약 대승 돈교법을 만나거든 경건하고 성실하게 합장해서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라.

결국은 부처님 법이 귀중한 것이니까 부처님 법을 만났을 때 정말 경건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고 합장하는 마음으로 지극한 생각을 다해서 공부하고 구하라는 말입니다.

대사가 법을 설해 마치는데 위사군과 관료와 성중 도속이 찬탄하는 이야기를 한없이 하면서 한결같이 ‘옛날에 들어보지 못한 법문이다’라고 말을 하였다.

위사군은 소주자사입니다. 소주 자사가 육조 스님에게 법문을 청해서 이 육조단경 법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던 관료, 스님, 도교인, 속인들 모두가 이 법문을 찬탄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에서 참회하라는 말을 하면서도 육조 스님 같이 이렇게 참회를 이해하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선종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20. 공덕(功德)

공덕도 우리가 법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공덕을 말하자면 양무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양무제 자신은 절을 짓고 스님들에게 보시하고 공양하면서 공덕이 크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달마 스님은 공덕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육조 스님이 말하는 공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선종이기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인데, 이것이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절을 짓고 보시·공양하는 공덕은 인과의 복입니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선한 일을 하면 선한 결과를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악한 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공덕은 됩니다. 그러나 진짜 공덕은 그게 아닙니다.

선인선과는 인과법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절에 왔을 때만 해도 인과법문을 하는 노스님들이 참 많았는데, 요즘은 도가 좀 높아졌는지 모르겠지만 인과법문을 하는 이들은 별로 없고 전부 다 선(禪) 법문을 합니다. 저도 그중 한 사람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복은 사실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아닙니다.

달라이라마 같은 스님들은 인과법문을 많이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기에는 좋습니다. 세상에는 인과도 지키는 사람이 흔하지 않습니다. 인과만 지켜도 우리사회에 혼란이 덜 일어날 것입니다. 인과만 지켜도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인과보다도 더 깊은 법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깊은 이야기를 이해만 하더라도 인과는 다 그 속에 녹아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법을 이해하고 행하면 인과는 그 속에 있는 것이니까 한몫에 같이 하는 것이 됩니다. 인과를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사군(소주 자사)이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되 화상의 설법은 실로 불가사의함이로다. 제자가 일찍이 조그마한 의심이 있어서 화상에게 묻고자 하오니,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대자대비로 제자를 위해서 설해주소서.

대사가 말하되, 의심이 있으면 곧 물어라. 어찌 모름지기 두 번 세 번 하겠는가.

위사군이 묻되, 법은 가히 서국(인도)의 제1조 달마조사의 종지가 아닙니까.

대사가 말하되, 그렇다.

제자가 설하는 것을 보니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교화할때 달마대사에게 묻되, “짐이 일생 이래로 절을 짓고 보시하고 공양했으니 공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하자, 달마대사가 답해 말하되 “공덕이 없느니라”하고 대답하시니, 양무제가 실망하여 드디어 달마대사를 보내서 국경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알지 못하겠으니 청컨대 화상은 설해주소서.

육조스님이 말하되,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아 달마대사의 말을 의심하지 말아라. 무제가 사도에 집착해서 정법을 알지 못함이니라.

정법을 알지 못하니까 절 짓고 보시하는 것이 공덕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복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정법을 몰라 그랬다고 했는데 정법이 바로 정견입니다. 정법을 알게되면 우리는 도도 닦고 복도 닦고 같이 닦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법을 모르면 도는 못 닦고 복만 닦게 됩니다. 도를 닦지 못하고 복만 닦으면 삼업(三業)이 없어지질 않습니다. 삼업이 그대로 남습니다. 우리가 법을 이해하고 도를 닦게 되면 복도 그 속에 다 있기 때문에 삼업도 없애고 복도 짓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어디 가서 봉사를 많이 하는데, 정견을 갖추고 봉사를 해야 그것이 복이 됩니다. 정견을 갖추지 않고 봉사를 하는 것은 선행밖에 안됩니다. 선행은 불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도도 닦고 복도 닦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정견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도 닦는 것이 복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도닦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앞에서 마음속에 악한 인연을 없앤다고 했는데, 그 악한 인연 없애는 것이 도 닦는 것이고 복 닦는 것입니다. 이것을 같이 보셔야 합니다. 지금 불자님들이 복에만 자꾸 치중하면서 도를 닦지 않는 것은 복을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지혜는 살아가는데 정말로 유용하고, 그 중에서도 사업이나 가정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다 적용이 됩니다. 지혜롭게 가정과 사회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으면 성격도 바뀌고 삶도 바뀝니다.

그리고 지혜가 내 마음속에서 계발이 되면 세상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무엇을 바라기보다 내가 남에게 잘하는 것이 나에게 잘하는 것이라는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나에게 잘하는 것이 남에게도 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절대로 싸우지 않고 서로 고마운 관계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이니까, 지혜를 계발하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망상의 구름을 없애면 지혜의 해(日)가 나옵니다.

사군이 묻되,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달마스님이 공덕이 없다고 하니까 어째서 공덕이 없는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화상이 말하되, 절을 짓고 보시하고 공양하는 것은 자못 복을 지음이니라. 가히 복을 가져서 공덕을 삼지 못함이니, 공덕은 법신에 있음이요 복전(福田)에 있지 아니함이니라.
앞에서 말했듯이 본질 그 자리에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을 이해하면 도도 닦고 복도 짓고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법성에 공덕이 있으니 견성하는 것이 공이고 평등하고 곧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덕이다.

우리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행복한지 아십니까. 절대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비교하면서 속상해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니까 지혜로써 자기 발전에 그 시간을 이용하게 됩니다. 우리는 비교하면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값있는 시간낭비가 아니고, 자기를 학대하는 시간낭비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종교라고 해서 꾀를 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혜(반야)와 덕을 같이 겸비한 것입니다.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을 행하라. 만약 일체인을 가벼이 여겨서 나라는 아상을 끊지 못하면 스스로 공덕이 없다.

나라는 아상이 있는 한 그 사람 마음속에는 절대로 공덕이 없습니다. 그 아상이 마음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놈이 물러가야 공덕이 나올 수 있습니다. 도둑놈이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성은 허망해서 법신에 공덕이 없느니라. 생각 생각이 덕을 행해서 평등하고 곧은 마음이면 덕이 곧 가볍지 아니하니 항상 공경하여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공이 되고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덕이니라. 공덕은 자심에서 지음이니 복이 공덕과 더불어서 다르거늘 이 다른 것을 알면 복이 공덕이 되지 않고 공덕은 복이 된다고 알면 같다. 복이 공덕과 더불어 다르거늘 무제가 정리(바른이치)를 알지 못함이요 조사스님들의 허물이 아니다.

양무제가 정견을 갖추지 못한 것이지 조사스님들의 공덕에 대한 설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도 닦는 것은 복을 겸해 있는 것이고, 복 닦는 것은 도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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