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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이름과 실상

기자명 법보신문

항시 나를 돌아보는 삶이 거짓 면하는 길
명예에 집착말고 직분에 맞게 살아가야

모든 만물의 존재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이름이 있다. 그러기에 자연은 이름 없는 물건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어떤 실상의 모습이 있다면 이름은 따라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다시 뒤집으면 이름은 실상이 있고나서 그 실상을 지칭하기 위하여 빌려온 것이 된다. 요즘 ‘가짜’라는 말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데, 이 가(假)라는 말이 바로 빌려왔다는 뜻이다. 빌려온 것은 내 것이 아니니 바로 거짓이 된다.

그러나 이름이 없고서는 실체를 드러내어 알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니, 이 이름과 실상의 사이를 참과 거짓이라는 상관적 관계로만 바라보고 모든 것을 빌려온 가짜로 볼 수만도 없다. 이러한 이름과 실상의 관계를 사회적 질서를 정의하는 윤리적 가르침에서는 ‘명분’이라 하지 않는가 생각 된다. 명분이란 이름과 분수이다. 어떤 이름이 주어지면 그 이름에 맞는 분수가 뒤따른다. 요즘 우리의 삶에는 이름은 거창하게 자랑하나 그 이름에 걸맞은 분수는 잊고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아비’라는 이름에는 아비로서의 분수를 지칭하는 ‘엄하다’의 ‘엄부(嚴父)’이어야 하고, ‘어미’라는 이름에는 어미로서의 분수인 ‘사랑하다’의 ‘자모(慈母)이어야 하는데, 아비는 나약하고 어미는 억세지는 기현상을 보게도 된다.

직장에는 자리라는 직위가 있고 그 직위에는 그 자리에 맞는 직분(職分)이 있다. 이것이 바로 직위의 분수이다. 자리만 차지하고 그 자리에 맞는 분수를 지키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거짓이요, 이 거짓이 바로 가짜인 것이다. 직장의 직위란 그 직이 존재하게 된 직장 모두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구성 모두를 위하여 봉사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자칫 그 구성을 통제하려거나 군림하는 자세는 직위만 있고 분수는 없는 꼴이 된다.

유교적 가르침의 명분이라는 말은 불교에서는 명색(名色)이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엄밀히 구별하면 동일하지 않겠지만, 정신과 물질을 아우르는 용어로서의 명색이 유형적 실체를 색으로 말한다면 이 색을 지칭하는 이름이 명이니, 역시 이름은 실체에 대한 빌려옴의 가체일 듯하다. 그러니 빌려온 이름의 바른 구실은 실체에 맞는 바른 행위이어야 할 것이다.

색(色)과 공(空)의 구별을 두지 말아야 하는 궁극적 달관에 들면, 이름도 실체도 없는 것이요, 모든 것이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있다 함도 빌려온 있음의 가유(假有)이고, 없다 함도 빌려온 없음의 가무(假無)일 것이다. 나의 존재가 바로 나의 실체이나,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나 하는 원인을 규명해 보면, 물질적 원소인 지, 수, 화, 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를 빌려 온 것이요, 인연 화합의 어울림으로 본다면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을 빌려온 취합물이 아닌가.

내 몸 자체가 어디에선가 빌려온 가짜임을 직시한다면 삶의 바람직한 행위가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말해서 가짜인 나를 실체다운 참 삶으로 사는 것이 사람살이의 기본이 아닐까. 그런 삶이 바로 명분이나 명색에 맞는 삶이라 한다면, 거짓에 불과한 이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분수나 색깔에 맞게끔 내 삶을 조종해야 할 것이다. 명분이나 명색과 어원은 같이 하면서 극단적 대치상황으로 달리는 말이 ‘명예’나 ‘명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름으로 자랑함이 명예요, 이름으로 이득을 얻음이 명리라면 실체의 거짓인 이름에 얽맬 수밖에 없다.

삶의 질서에 제도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지만, 배움의 제도에도 배움의 지위를 정하여 높낮이를 재다 보니, 이름만 있고 분수가 없는 가짜의 생산도 있게 마련이다. 내 몸마저도 실유(實有)가 아닌 가유(假有)인데 학위의 진가에 매달려 무엇 하나. 항시 나를 되짚어 보는 삶이 거짓을 면하는 길일 것이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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