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0년 삭힌 울음 거뒀으니 혼령이여 미소 지었는가

기자명 법보신문

고국 방문 故 윤이상 부인 이 수 자 여사

계절은 시나브로 가을인데 날은 아직도 30도를 오르내리던 지난 9월 10일. 인천공항 입국장 문이 열리자 백발이 성성한 여인이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들어 미소 짓던 여인은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외국인이 다가오자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외국인은 남편의 절친한 친구이자 남편이 고국에서 구금되자 유럽에서 석방운동에 앞장섰던 세계적인 작곡가 프란시스 트래비스. 둘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고 갔지만, 말보다도 무거운 벅찬 소회가 둘을 휘감았다. 故 윤이상 선생의 무인 이수자(80) 여사가 고국 땅을 밟던 날 하늘은 그렇게도 파랬다.

9월 10일 남편 영가와 함께 귀국

40년만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4번이나 바뀌었을 동안 이 나라는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이뤘는가. 그러나 그 긴 세월동안 고국에 대한 향수와 섭섭함이 뒤범벅된 감정의 응어리는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가슴에 변하지 않는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곁에서 바라보던 부인의 가슴에도 조국 ‘한국’에 대한 응어리는 짙은 얼룩이 되어 남았다.

“저는 이번에 윤이상 선생의 영령과 함께 귀국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습니다. 선생은 오히려 조국의 이름을 세계 방방곡곡에 널리 알리며 살아가신 분입니다. 이번에 선생이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윤이상.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기억되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영영 고국에서 추방돼버린 비운의 음악가. 반면 유럽이 선정한 현대를 움직인 작곡가이자 독일 자아르브뤼켄 방송이 뽑은 20세기 100년간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음악 전문가라면 누구나 윤이상을 알고 있지만 그의 음악을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어 국내 음악계에서는 이를 일컬어 ‘윤이상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역사 속 위대한 예술가는 조국의 영광이자 기상이요, 자랑입니다. 독일의 베토벤이 그랬고 핀란드의 시벨리우스가 그랬고,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가 그랬습니다. 윤이상 선생은 세계 음악계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지만, 조국으로부터는 아픔만 받았습니다. 오히려 조국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꼴이었습니다.”

지난해 무혐의 판정과 함께 통일부장관의 사과를 받았지만 아직도 섭섭함이 가시지 않은 듯 했다. 1995년, 그렇게도 고향을 그리워하던 윤 선생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자 여사는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남편의 명예가 회복되기 전까지 고국 땅을 밟지 않으리라.” 여사는 그 다짐을 마침내 이뤄냈지만 지난날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육신마저 세상과 작별하던 날 그의 곁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토록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음에도 말이다. 그런 그의 마지막 길을 한국에서 건너간 몇몇 스님들이 함께 해주었다. 이 여사는 그런 불교계의 손길을 고마워했다.

“12년 전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해준 것이 불교예요. 그 어렵던 수십 년간의 타향살이에서 위로가 돼준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독일에서 공부하며 기독교 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대대로 불교집안이었던 저는 왠지 기독교가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외롭게 독일에서 생활하면서도 불교를 의지처로 삼아 버텨왔지요.”

이 여사는 불교에 대한 큰 애정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는 말만 ‘불교’였던 북한의 사찰과 스님들이 제대로 격식을 갖출 수 있도록 북한 불교계를 변화시킨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중앙신도회 이지범 기획실장은 “북한 사찰 내 스님이 상주할 수 있도록 한 것, 일부 스님들이 삭발을 하고 법복을 입고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이 모두 1998년 11월경부터”라며 “이는 기도와 신행이 이뤄져야 할 사찰에 촛대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고 향냄새도 나지 않는 것을 본 여사가 당국에 건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소중했던 것은 윤이상 선생에게도 마찬가지다. 선생은 종종 인천 용화사 송담 스님에게 전화를 걸어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 고향 땅이 그리워 일본에서 배를 타고 한일 해역 경계선까지 나와 아른거리는 통영 항구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지었던 선생이다. 그는 동양사상을 녹여낸 작품으로 명성을 떨친 작품 150곡 중 ‘나비의 꿈’, ‘바라’와 같은 불교 소재의 작품을 다수 남기기도 했다.

고국의 뒤늦은 사과 아직도 섭섭

윤 선생이 생전에 거주하던 독일 베를린 자택 마당에는 한반도 모양의 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 남과 북의 구분은 없다. ‘빨갱이 두목’으로만 매도했던 우리와 달리 선생에게 남과 북은 단절된 하나의 조국일 뿐이었던 것이다.

“남편의 정치적인 명예회복은 이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서는 아직도 한국 정부가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남긴 많은 예술적 유산들을 정부가 잘 갈고 닦아 꽃피우길 바랍니다. 그래서 민족정기를 널리 선양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민족의 아들로 살아간 사람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합니다.”

고국에서 이 얘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을까. 남편 이야기를 하며 그는 자주 눈물지었다.

“지난 40년간 긴 고통의 시간을 지나며 감정이 많이 메말랐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분이 그토록 원했던 귀향의 한을 풀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더 눈물이 났습니다. 같이 오셨으면 고향의 물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 저는 그 곁에 앉아 있었을 겁니다. 고향의 산에 오르실 때 손을 맞잡고 그 길을 함께 했을 겁니다.”

진한 아픔과 그리움이 정리되지 않은 그 말 속에 배어 있었다.

불교에 의지…교계 따뜻한 손길 고마워

“선생은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었지요. 독일 현지 묘지에 안장할 때 이장하지 않는다는 계약이 돼 있어 현실적으로 이장 절차도 쉽지 않을 겁니다.”

11월 3일 봉은사에서 열리는 서거 12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정말 안타깝다. 꼭 참석하고 싶지만 일정상 불가능할 것 같아 애석하다”고 했다. 고국의 사찰에서 선생에게 향을 올릴 수 있길 얼마나 간절히 바래왔을까. 추모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대신 여사는 9월 11일 봉은사를 사전에 참배하고 돌아왔다.

여사는 윤이상 선생의 탄생 90주년을 맞아 9월 16일부터 열리고 있는 ‘2007 윤이상 페스티벌’에 참석하고 있다. 그리고 며칠 후면 이 땅을 찾을 때 그랬던 것처럼 파란 하늘로 다시 날아올라 평양으로 갈 것이다. 10월 20~22일 평양에서 열리는 ‘제26차 윤이상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좀처럼 웃지 않았다던 그가 이제는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돌아와야지요. 반드시 돌아와야지요. 이제 그분의 명예도 회복됐고 고국의 땅도 우리에게 다시 열렸으니 반드시 돌아와야지요. 그래서 선생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고국의 땅과 산과 물과 들판을 가슴에 담아 하늘에서 만나면 ‘당신의 고향은 참 아름다웠다’고 전해줘야지요. 꼭 다시 돌아와 고국에서 연주되는 그의 음악이 멀리 울려 퍼지는 모습을 지켜볼 겁니다.” 

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