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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맞서 항일운동-불교개혁 이끈 ‘大覺’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7.09.1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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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성지 죽림정사 성역화 회향
겨레의 보살 용성 조사
上 백 용 성(白龍城) 스님은 누구인가

“아버님! 이 물고기를 먹어 우리 가족들이 배부를 수는 있겠으나 그리되면 이 물고기는 생을 다하겠지요. 살아있는 것을 죽이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어린 아들의 기특한 자비심에 아버지도 기쁜 마음으로 고기를 방생한다. 낚시를 해서 애써 잡은 물고기를 방생하도록 아버지에게 이른 이 어린 아이의 자비심, 타고난 성품이리라. 어린 아이는 어머니가 고사리를 꺾을라치면 “고사리도 아프다”며 말렸고 병들고 가난한 이웃을 보면 부모님을 졸라 양식을 보시하게 한다. 그 영특함 역시 인근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빼어났다.

용성 진종(白龍城) 조사의 어린 시절은 이렇듯 매사 주위를 놀라게 할 만큼 자비롭고 지혜로웠다. 스님은 세계 열강의 조선 침탈이 움트기 시작할 즈음인 1864년 음력 5월 8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어머니 손씨 부인의 몸을 빌리어 세연을 맺었다. 이제 막 응석받이에서 벗어날 무렵인 14세 되던 해인 1877년 음력 10월 보름, 꿈속에서 부처님으로부터 수기(夢中佛授記)를 받은 용성 스님은 남원 덕밀암 혜월 화상의 문하에 입문해 3년 동안 행자 생활을 하며 출가 사문으로서의 습의와 행을 닦았다. 스님이 되기 위한 고행과 정진을 마친 뒤 혜월 화상의 가르침에 따라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에서 혜월 화상의 사제인 화월 화상을 은사로, 혜조 율사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수지, 득도했다.

스님에게 1910년은 ‘겨레의 육신보살’이란 화두를 던져 준 해이다. 일제 강점기의 시작을 알리는 치욕의 한일합방이 있었던 것. 일제의 강점에도 스님의 정진은 결코 위축됨이 없었다. 1911년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인 서울 서초동 우면산 대성초당에 주석하게 된 용성 스님은 종로구 봉익동에 있는 민가를 구입, 개축하여 ‘대각사’(大覺寺)란 사명(寺名)을 내걸고 불교와 민족중흥을 발원하면서 불교 개혁과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서슬 퍼런 일제의 총칼에도 민족의 독립과 자존의 복원, 불교의 중흥을 위한 정진은 쉼이 없었다.
용성 스님의 대각 사상은 불교라는 울타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종교, 세대, 계층, 남녀의 벽을 허물고 민족을 하나로 아우르는 대각 공동체에 일체 대중들이 몰려들었다. 1918년 대성초당에서 용성 스님은 만해 한용운 대사와 국제 정세를 비롯, 국내 정세, 이웃 종교와의 관계,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에 관한 혜안을 나누었다. 스님의 덕화에 동화돼 만해 역시 용성 스님을 심중의 스승으로 받들게 된 만남이었다.

민족을 바른 길로 견인했던 용성 스님의 지혜와 만해의 실천은 천도교와 기독교장로회, 기독교감리회 등 당시의 종교계가 손을 잡고 1919년(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게 한 씨앗이 되었다. 종로 태화관에 용성 스님을 주축으로 각계 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일제는 만세 운동을 주도한 용성 스님을 옥에 가두었다.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끝에 출옥한 스님은 왜색에 물든 불교와 단절하기 위한 방편으로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제일 가치로 여기는 ‘대각교’를 설립했다. 한문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역경 불사를 통해 불교 개혁에 나서기에 이른다.

1921년 4월 경전 번역을 위해 조직된 삼장역회(三藏譯會)는 용성 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주야로 역경 불사에 매달려 첫 한글판 경전인 『금강경』을 출간한다. 이후 『심조만유론』와 『신역대장경』, 『수심정로』, 『선문촬요편집의역』, 『대방광불화엄경』 등 수 많은 한글 경전들이 쏟아져 나왔다.

만주의 독립군을 향한 도움의 손길도 계속 이어졌다. 일제의 문화적인 침탈과 왜곡이 극심했던 1922년 만주의 독립군들을 돕기 위해 만주 연길 명월진과 봉녕촌에 대규모 대각교 화과원 선농당을 설립했으며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유랑하는 동포들에게는 생활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역경과 왜색 불교 타파를 위해 정진해 온 스님은 1926년 청정 승가는 사라지고 파계가 일상화되는 현상을 개탄하다 못해 계율 파괴의 핵심인 대처식육(帶妻食肉) 금지를 요청하는 건백서(建白書)를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런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각교’를 더욱 확대해 ‘대각교중앙본부’라는 명칭으로 불경 번역과 일요학교를 통한 교육 불사, 불교 혁신 등에 진력했다. 스님이 조계종 정화의 초조로 숭앙받게 된 연유이리라.

수행과 일이 하나임을 주창하는 선농불교(禪農佛敎) 역시 스님의 핵심 가르침 중 하나. 화과원을 세워 선농불교를 실천했으며 이곳에서 축적한 자금은 어김없이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다. 매헌 윤봉길 의사를 상해임시정부 백범 김구 선생에게 보내어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항일 의거를 실행케 한 스승 또한 용성 스님이었다.

일제의 침략 전쟁이 극에 달한 1940년,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독립 동지가 배반하고 상좌, 제자들이 잇따라 배신하는 것을 보며 깊이 슬퍼한 스님은 그토록 겨레의 독립을 원했건만 민족이 홀로서는 감격을 누리지 못한 채 그해 음력 2월 24일 세연을 다했다. 그 수법 제자 동헌 완규 스님에게 불교의 개혁과 민족의 융창을 염원하는 유훈 10사목(十事目)을 실현하라는 당부를 간절히 부촉한 뒤 열반적정에 들었다. 석가여래로부터 이어진 역대 조사들의 법맥을 그대로 전승한 용성 스님은 세연을 다하는 마지막까지 조선 불교의 지성화와 대중화, 생활화를 발원한 것이다. 063)353-0108

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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