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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50

기자명 법보신문

제 10장 오대산 연비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스님, 적멸보궁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찾을 게 뭐 있는가.”
“가르쳐주십시오.”
“그대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적멸보궁이네.”

일타는 오대산으로 갔다. 강원도 원주까지는 기차를 탔고, 또 진부까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승객의 요금표가 붙어 있었다. 군인 5원, 학생 5원, 일반 15원이라고 쓰인 요금표였다. 일타는 요금표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농담 잘하는 도성이 생각나서였다. 언젠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데 도성이 일타를 웃겼던 것이다. 도성이 차장을 불렀다.

“차장!”
“네.”
“나는 버스요금 안 내도 되지.”
“왜 그렇습니까.”
“요금표에 스님 요금은 쓰여 있지 않으니까!”
“당연히 일반 요금을 내셔야죠.”
“내가 학생인가, 일반인가, 군인인가, 중은 중이지 일반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다 이거여.”

차장은 도성의 유도심문에 넘어가 요금을 받지 않고 가버렸다. 도성이 버스요금 탁발을 말재간으로 한 셈이었다. 일타도 버스차장에게 그럴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러기에는 마음속에 연비를 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뜨거웠다.

버스는 진부 정류장이 종점이었다. 그곳에서 일타가 가고자 하는 상원사까지는 걸어서 가야 했다. 버스가 진부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날이 어둑어둑했다. 그믐날 밤이었으므로 달도 뜨지 않을 터였다.

일타는 시장하여 허름한 식당으로 찾아 들었다. 식당은 손님이 없어 호롱불도 켜지 않고 있었다. 일타는 주인을 불렀다.

“계십니까.”
“장사 끝났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나와 보지도 않고 방안에서 소리쳤다.

“스님입니다.”
“스님이라니, 웬일이십니까.”

주인아주머니가 방문을 열고 식당으로 나왔다. 방안에서는 네댓 명의 식구들이 불도 켜지 않은 채 둥근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상원사에 가다 저녁공양을 하려고 들렀습니다. 이 근방에는 이 식당밖에는 없군요.”
“장사는 끝났지만 스님 공양은 하셔야지요. 저도 상원사 다니는 신도구먼요.”
“장사가 끝났다니 미안합니다.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스님, 죽입니다만 같이 드시지요. 막 저녁을 먹으려던 참입니다. 그러니 숟가락 하나만 놓으면 되니까 들어오세요.”

일타는 망설이다 방안으로 들어갔다. 식구들은 식당 아주머니의 쌍둥이 딸과 막내인 듯한 아들이 전부였다. 모두 밥을 굶은 것처럼 죽그릇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죽그릇을 요절을 낼 태세였다.

“미군부대에서 타온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예요. 스님, 수제비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아주 좋아합니다.”
“잘됐네요. 마음껏 잡수시고 우리 집 식구들 기도 좀 해주세요.”

일타는 배가 고팠으므로 수제비를 두 그릇이나 비웠다. 식당아주머니는 일타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는 흐뭇해했다.

“스님, 공양하시는 것을 보니 수행도 잘하시겠네요. 잘 먹는 사람이 무슨 일이든 잘 하더라고요.”
“보살님, 약속하겠습니다. 무슨 기도를 해드릴까요.”
“에휴, 피난 갔다가 생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애들 아버지만 있겠어요. 그냥 입버릇처럼 해본 소립니다.”
“상원사는 늦었으니 누추하지만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내일 가셔요. 저는 딸들하고 자고 스님은 막내아들하고 자면 됩니다.”
“아닙니다. 가야 합니다.”
“스님, 큰일 납니다. 밤길에 상원사를 가다니요, 사람을 해치는 맹수라도 나타나면 어찌하려고 그럽니까.”
“보살님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저는 꼭 오늘밤 안에 상원사를 가야 합니다.”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저에게는 시간을 다투는 화급한 일입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기어이 일타는 걸망을 메고 일어섰다. 절박한 마음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으므로 견딜 수 없었다. 식당아주머니가 울상을 지었다.
“스님, 이 시간에 산길을 가다니요. 큰일 납니다. 요즘에는 공비들이 없어지긴 했습니다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타는 합장을 하고 일어섰다. 밖은 어느새 칠흑처럼 캄캄했다. 흐릿한 별들이 깜박일 뿐 검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한치 앞을 분간키 어려웠다. 그래도 일타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한 줄 나 있는 산길을 달리듯 걸었다.

진부 소재지를 벗어나 숲길로 접어들자 동물 울음소리가 났다. 등이 곧 땀에 젖었다. 밑도 끝도 없이 무서움도 들었다. 식당아주머니 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타는 두려움도 들고 하여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상원사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아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적멸보궁에 계신 부처님도 나를 오라 가라 한 적이 없다. 내가 가면 부처님께서 부르는 것이고, 내가 가지 않으면 부처님께서 부르지 않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부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 셈이다. 그렇다. 부처님께서 나에게 진짜 중노릇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줄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가야 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더 들수록 일타는 크게 소리쳤다.

“외할아버지 추금스님께서는 스스로 온몸을 태우는 자화장을 하셨다. 생사를 마음대로 넘나드신 추금스님이다. 추금스님께서는 자화장을 함으로써 몸뚱어리에 대한 애착을 끊고 생사를 해결하셨다. 무상한 몸뚱어리이므로 집착할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다. 나도 몸뚱어리가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리라. 몸뚱어리가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기만 해도 중노릇을 더 잘할 수 있으리라. 늘 발심한 채로 정진할 수 있으리라.”

일타는 자신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멸보궁 부처님이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등은 소나기를 맞은 듯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멀리 불빛이 보였다. 상원사 길목에 있는 월정사가 분명했다. 일타는 그만 월정사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을까 망설였다. 어둠 속에서 불빛을 보니 불나방처럼 그곳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일타는 이를 악물었다. 일타는 또 중얼거렸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지장보살.”

그러자 발길이 월정사에서 멈추지 않았다. 상원사 쪽으로 향했다. 알 수 없는 여러 불보살들의 가피였다.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여러 불보살들이 눌러주었다. 우직한 용기를 주었다. 일타는 『반야심경』과 『천수경』과 『금강경』을 노래하듯 외웠다.

이제는 머릿속에서 두려움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무서운 공포감도 번뇌 망상이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나니 산길은 산길일 뿐이었다. 산길은 산길일 뿐인데, 일타 자신이 번뇌 망상으로 다르게 보았던 것이다. 다르게 볼 근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번뇌 망상을 버리니 산길은 산길이고 일타는 일타였다.

그러나 일타는 기진맥진했다. 진부에서부터 마라톤 선수처럼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온 것 같았다. 자신을 해치고자 하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는데 스스로 두려움을 지어놓고 거기에 빠졌던 것이다. 일타는 자신을 속인 자신이 어이없어 실소를 했다.

‘경을 보면 무엇 하나. 나한테도 깜박 속는 것을. 그러니 화두 들고 깨쳐야 한다. 내 진짜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 깨친다 함은 내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아는 것 아닌가. 내가 나를 아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이 몸뚱어리에 집착할 이유가 사라져 버리는데 말이다.’

마침내 일타는 상원사에 도착했다. 원주를 찾기도 전에 종각 기둥에 머리를 대고 쓰러졌다. 밤이슬을 피해 잠시 종각 기둥에 몸을 의지한 채 쉬려고 했는데 그만 잠이 들었다. 일타는 잠이 들어 짧은 꿈을 꾸었다.

적멸보궁 허공 너머에서 해가 뜨는 듯 빛살이 솟았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빛살은 한 개 두 개에서 점점 많아졌다. 한 개가 두 개가 되고, 두 개가 네 개가 되고, 네 개가 여덟 개가 되더니 순식간에 세상을 광명천지로 만들었다. 잠시 후에는 붉은 구름장을 타고 수천수만의 불보살들이 날았다. 불보살 한 가운데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연꽃을 들고 미소 짓고 있었다. 일타는 순간 염화시중을 깨달았다. 일타도 부처님을 향해 미소 지었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누군가가 일타를 흔들었다.

“스님, 스님.”
“나를 깨우지 마시오. 이대로가 극락입니다.”

일타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한 노스님이 등불을 들고 있었다. 희미하게 드러난 노스님이 말했다.

“어디서 왔는가.”
“진부에서 왔습니다. 종각에 잠깐 앉았는데 그만 잠이 들었나 봅니다.”
“어서 저쪽 요사채에서 눈을 좀 붙이시게. 조금 후면 도량석이 시작되니까.”
“밤중에 와서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지. 적멸보궁의 부처님께서 부른 것이네.”

일타는 요사채 뒷방으로 들어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쉬었다. 눈을 붙이고 말 것도 없었다. 조금 후에 도량석이 시작됐다. 도량석의 목탁 소리는 세상의 잠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타의 잠을 깨웠다. 일타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가을 논물처럼 맑아졌다. 어둔 방에 불을 켜면 일시에 밝아지듯 일타의 머릿속도 그랬다. 도량석을 하는 스님의 목탁소리에 무명 속에서 기생하던 번뇌 망상이 일시에 사라졌다.

일타는 당장 장좌불와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신과 달리 육신은 극도로 피곤했다. 그래도 일타는 등을 방바닥에 눕히지 않는 장좌불와 수행을 미루지 않았다.

‘부처님께 어찌 3배만 할까 보냐. 하루에 3천 번을 하리라. 그것도 7일 동안 계속하리라.
그런 다음 나 자신과의 약속인 발원문을 쓰고 연비를 하리라.’

일타는 당장 일어났다. 요사채 방문을 열고 나오자, 새벽하늘에는 벌써 푸른빛이 돌고 있었다. 일타는 종각으로 가 좀 전의 그 노스님에게 물었다. 노스님은 도량석을 마치고 대종을 치려 하고 있었다.

“스님, 적멸보궁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찾을 게 뭐 있는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적멸보궁이네.”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그대가 서 있는 곳이 적멸보궁이라고 했네.”

일타는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났다. 상원사에서 만난 첫 스님의 선기에 주눅이 들었다. 일타는 그 자리에서 삼배를 올리고 물었다.

“스님,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가르쳐 줄 것은 없네. 그대가 스스로 깨닫게나.”

노스님은 일타를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여태까지 보아왔던 스님들과 또 달랐다. 일타가 당황해하자 노스님이 말없이 손을 들어 적멸보궁 가는 길을 가리켜주었다.

“내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게나.”
“스님, 감사합니다.”

일타는 참으로 노스님에게 고마워했다. 다시 삼배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노스님은 대종을 치기 시작했다. 대종소리는 일타가 몇 발짝씩 걸음을 뗄 때마다 아주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일타는 합장한 채 적멸보궁으로 향했고, 범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아, 부처님께 목숨을 다 바쳐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겠나이다.’

적멸보궁은 텅 비어 있었다. 다행히 법당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일타는 등잔을 찾았다. 그러나 법당 안에는 성냥도 등잔도 없었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었다. 문을 여니 푸른 새벽빛이 해일 밀려오듯 법당 안에 가득 찼다. 보궁은 말 그대로 용궁이 되고 용화세계가 됐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하늘법당이 됐다.

일타는 오대산이라도 밀어붙일 듯한 신심을 느꼈다.

‘아, 부처님께 맹세합니다. 목숨을 다 바쳐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겠나이다.’

일타는 절을 시작했다. 하루 3천배를 하는데, 5백배씩 하고 땀을 닦기로 했다. 첫 5백배를 하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한 스님이 보궁 앞에서 합장을 하고 있었다. 해인사에서 올라온 혜암이었다. 혜암도 장좌불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수마를 쫓기 위해 밤새 적멸보궁과 상원사를 오가며 정진하고 있었다. 잠을 자지 않고 밤새 걷는 행선(行禪)이었다.

“스님, 어디서 본 듯한 인연입니다.”
“통도사에서 온 일타입니다.”
“나는 해인사에서 왔습니다.”

통성명을 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서로가 묻지 않았다. 각자가 공부에 바쁘기 때문이었다. 혜암은 곧 산허리를 휘감은 운해 속으로 사라졌고, 일타는 법당으로 들어가 다시 절을 계속했다.

운해가 피어오르는 적멸보궁은 한 송이 연꽃이 되었다. 부처님이 마하가섭 앞에서 든 한 송이 백련이었다. 일타는 부처님의 향기를 맡으며 절을 했다. 염화시중 화두를 들고 절을 했다.

‘이 길이 부처님에게로 가는 길임을 압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일타는 1배 1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그러나 1천배를 넘어서부터는 그런 마음조차도 무거워 내려 버렸다. 무념무상으로 돌아갔다. 3천배를 마치고 나면 상원사 산내암자인 서대 염불암으로 가서 쉬었다. 서대 염불암은 너와집 암자로 이미 혜암이 와 머물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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