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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⑫

기자명 법보신문

마음에 망념 없는 줄 알면 곧 진여문에 든다

지금까지 해석분 가운데 바른 뜻을 밝히는 부분(顯示正義)에서 먼저 뜻을 풀이하였다. 이제는 생멸문으로부터 바로 진여문에 들어가는 부분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우리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오음(五陰)은 크게 색과 심으로 나뉜다. 색음을 추구한다면 모든 색을 부러뜨려서 극미에까지 이른다 해도 그 실체를 영구히 얻을 수가 없다. 육진경계라는 것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서는 생각할 만한 모양이 없는 것이다. 또한 수·상·행·식음의 심(心)도 형상이 없어서 시방(十方)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다. 중생은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동념(動念: 즉 망념)을 추구해 본다면 이미 없어졌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오, 중간에 머무는 바가 없다.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일어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심성(心性)이 실로 움직이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잘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이 없는 줄 알면 바로 진여문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정의를 밝혀 진여문에 들어가게 되는 데에는 또 하나의 관문이 있다. 바르지 못한 삿된 집착(邪執)을 다스려 없애는 것이다. 모든 삿된 집착은 결국 아견(我見)에 말미암는 것이므로 이 아견을 없애면 삿된 집착이 없어진다. 이 아견에는 인아견(人我見: 人執, 我執이라고도 함)과 법아견(法我見: 法執)의 두 가지가 있다. 인아견은 총상(總相)을 주재하는 자가 있다고 계탁, 집착하는 것이오, 법아견은 일체법이 각기 체성(體性)이 있다고 계탁, 집착하는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인아견을 다섯 가지로 나누고, 그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는다. 즉 첫째 경의 “여래법신이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는 말에서 허공을 여래성으로 잘못 계탁하는 것이다. 허공상은 망법이므로 실체가 없는 것이나 색으로 인해 볼만한 상이 있으며, 이 때문에 마음을 생멸케 한다. 모든 색법은 본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만약 색이 없다면 허공상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경계가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망념이 없어지면 모든 경계가 없어지고 오직 하나의 진심(眞心)으로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여래의 광대한 성지(性智)다. 이를 허공에 빗대어 말했을 뿐 허공상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둘째 경에서 “…열반·진여의 법도 필경 공하다.”는 말을 듣고 진여·열반의 본성이 오직 공(空)이라 잘못 생각하는 것이니 진여·법신은 자체가 공하지 아니하여 무량한 성공덕을 구족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경에서 “여래장은 증감이 없어서 그 체가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는 말을 듣고 여래장은 색·심법의 자상과 차별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니 이는 진여의 뜻으로 말한 것이며, 다만 생멸염 즉 업식의 생멸상의 뜻에 의해 차별된 상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넷째 경에서 “세간의 모든 생사염법이 다 여래장에 의해 있는 것으로 일체의 모든 법은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여래장 자체에 모든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갖추었다고 잘못 생각하니 여래장은 본래 간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정공덕(淨功德)이 있어서 진여의 뜻을 여의지 않은 것이지, 간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염법이 오직 망녕되이 있는 것일 뿐 그 자성은 본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여래장의 체에 망법이 있다면 우리가 깨달아서 영원히 망법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다섯 째, 경에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서 중생은 처음이 있으며, 그 처음을 보기 때문에 여래가 얻은 열반이 마침이 있어 다시 중생이 된다고 잘못 생각한다. 여래장은 과거(시초)와 미래(마지막)가 없으니 과거가 없으므로 무명의 상이 시작함이 없으며, 미래가 없으므로 부처가 얻은 열반도 후제가 없는 것이다.

위의 다섯 가지 집착이 모두 법신·여래장 등 총상의 주(主)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므로 인집이라 한다.

다음 법아견이란 중생은 오음으로 구성된 것이므로 오음이 생멸하는 것에 대해 생사를 두려워하여 잘못된 생각으로 열반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음법은 그 자성이 없는 것이며 본래 없으므로 따라서 없어지지도 않아 본래 열반임을 알아야 한다. 원래 여래는 둔근인 이승에게는 인무아(人無我)만을 설하였으나 이는 구경한 설법이 아니며 이에 법무아(法無我)까지 설명한 것이다. 요컨대 인아집·법아집의 망집을 끝까지 다 여의려면, 염법과 정법은 서로 의지하는 것이므로 말할 만한 자상이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색도 아니요, 심도 아니며 지(智)도 아니요, 식(識)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니어서 그 모양을 끝내 말할 수 없는데도 여래가 이처럼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는 뜻은 중생 모두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은정희 전 서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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