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성립사범대서 교수로 인재 양성
33. 성립사범대서 교수로 인재 양성
  • 법보신문
  • 승인 2007.10.01 2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시즘-사회주의 등 다수 집필
저서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아


성숙이 상해에서 집필활동을 통해 모은 원고료로 일정한 벌이가 없는 혁명가들을 도와주었을 때, 광동 꼬뮨과 해륙풍 소비에트에 참여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김산과 오성륜도 도움을 받았다. 오성륜은 한때 성숙의 처형과 연애를 하며 사랑을 나누기도 했으나, 30년대에 만주에서 중국공산당과 연결된 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하다가 끝내 체포되었고 일제의 회유로 결국 전향해 만주국 치안부(또는 관동국 특무대) 고문으로 일하기도 했다. 성숙으로서는 절친한 동지 한명을 잃은 셈이다.

성숙이 언론과 출판일에 종사하면서 식민지의 학생 문제 등 여러 가지 주제로 작성했던 논문을 엮어 낸 책은 무려 20여 권에 달했다. 한국혁명의 중요한 이론적 지도자였던 성숙은 비밀이 요구되는 일은 결코 좋아하지 않았기에 공개적인 활동을 즐겼다. 하지만 책을 내는데 있어서는 각기 다른 필명을 사용했다.

중산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이미 이론가로서의 소양을 충분히 쌓은 성숙은 실제 정치투쟁을 통해서 경험을 축적했고, 또 항상 독서를 하고 집필활동을 하면서 이론적 부분을 더욱 두텁게 했다. 이렇게 이론가로서의 명망을 쌓아가는 한편, 1931년에 중국의 반제국주의동맹에서 간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기관지인 『봉화』와 『반일민족』의 편집위원을 맡아 자신의 논지를 펴 나갔다. 성숙은 이때 당시 채정해 장군이 지휘한 19로군의 항일전쟁에 적극 가담했으나, 32년에 이 항일 전쟁이 실패하고 상해에서 일본의 공세가 더욱 심해지자 부득이하게 광서성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백숭도 장군의 추천으로 성립사범대학에서 1년간 교수생활을 하게 됐다.

성숙에게 있어서 이 시절의 교수 생활은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세월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어떠한 부양의 의무도 없었으며 자신이 열망하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인재들을 양성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욕심도 없이 행복했던 것이다.

성숙이 상해에서 광서성으로 거취를 옮겨 교수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광동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원봉은 무력투쟁의 길로 나서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1928년 상해에서 안광천을 만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폈던 김원봉은 북경으로 가서 항일투쟁에 나설 간부들을 양성하는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웠으나, 국내로 잡입시킨 동지들이 목적달성에 실패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특히 재정사정이 어려워지게 되자 황포군관학교에서 인연을 맺었던 중국국민당 정보기관 남의사의 책임자로 있던 강택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당시 강택은 삼민주의청년회를 조직해서 지도할 정도로 세력이 컸고 김원봉은 그의 도움을 받아 남경에 군관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일본의 눈을 속이기 위해 남경중앙군관학교 제6지대라는 이름을 붙인 학교를 세우고 나서 국내의 젊은이들을 불러들여 무상교육을 시행하며 항일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성숙이 보기에 김원봉은 완전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보통의 혁명가들이 생각하는 정도의 공산주의 사상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성숙과 같은 민족주의자였고 애국자로서 항일을 앞세운 투사였을 뿐이지 공산주의가 좋아서 푹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 김원봉이 그렇게 무력투쟁을 준비하고 있을 시기인 34년 성숙은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하생활을 하면서 저술활동에 전력을 다했고 『일본경제사론』『변증법전정』『통제경제학』『중국학생운동』 등의 역서를 출간했다. 일본의 파시즘과 당시에 새롭게 대두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경제체제 등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성숙의 연구 성과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들은 지금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sjs88@beopbo.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