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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에 있어도 마음이 깨끗하면 죄 없다

기자명 법보신문

21. 서방(西方)

<사진설명>육조 혜능 스님의 삭발 수계 도량인 광동성 광저우 광효사. 중국 최초의 보리수 나무 뒤쪽에 의발탑이 있다.
위사군이 예배하고 또 묻되, 제자가 보니 승과 도속이 항상 아미타불을 염해서 서방에 나기를 원하니 청컨대 화상은 설해 주소서. 저곳에 날 수 있습니까. 바라옵건대 의심을 파해주소서.

위사군이 평소 불자들을 보니 스님이나 도교 믿는 분들이나 신도님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염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원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아미타불을 염하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서 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지금도 염불을 하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바라는 불자님들이 많습니다.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계시고 우리가 거기에 가서 나기를 원하는 것은 자력으로 나기 보다 타력으로 아미타불 부처님을 염해서 나기를 바라므로 타력이 되기 때문에 자력불교와 맞지 않는다는 말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불교는 어디까지나 자력이지 타력이 아니라는 것이고, 오직 유심정토(마음이 정토)고 자심미타(자심이 아미타불)여서 결국 타력을 말하는 것 같아도 자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에게 서방정토와 아미타불을 어떻게 보시느냐고 묻는 것인데, 선에서는 자력으로 보고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우리와 거리가 떨어진 먼 세계가 아니고 바로 우리 마음이라는 말을 육조스님께서 하십니다. 이런 것을 육조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한번 정리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어쨌든 선은 손가락보다도 달 입장에서 항상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과 전적으로 일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견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사가 말하되, 사군아 들어라 혜능이 설해주리라. 세존께서 사위국에 계셔서 서방에 인도하고 교화함을 설함이 경에 분명하니‘이곳에 가는 것이 멀지 아니함이라’하였다. 자못 하근기를 위해서는 멀다고 설하고 가깝다고 설하는 것은 자못 상근기의 지혜인을 말미암는다.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세계를 말하면서 ‘염불을 해서 그곳에 가서 난다’고 하는 것은 멀다는 것이고, 멀다는 것은 하근기를 위해서 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지 않고 아주 가깝다고 설하는 것은 상근기의 지혜인을 위해서 설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더라도 육조 스님은 철저히 서방정토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이 유심정토이며 자심미타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양종이 있으나, 법에는 같지 아니함이 없다.

사람은 상근기와 하근기가 있어서 하근기 사람에게는 염불을 부지런히 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서 나라고 가르치고, 상근기 사람에게는 그렇게 가르치기 보다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바로 우리 마음이며 아미타불도 우리 마음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미하고 깨달은 것은 다름이 있어서 견해가 빠르고 더딘 것이 있다. 미한 사람은 염불을 해서 저곳에 나고 깨달은 자는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함이니 그러함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깨끗한 마음을 따라서 곧 부처의 땅도 깨끗함이니라.

미한 사람은 근기가 약한 분이고 깨달은 사람은 근기가 수승한 분을 말하고, 그런 차이가 있어서 견해가 빠르고 늦은 것이 있는 것이지 법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도 깨끗하다는 말이 나왔었는데 ‘나다-너다’‘있다-없다’고 하는 양변을 여의는 것을 우리는 깨끗한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래서 양변을 여의면 그 자리가 바로 서방정토이고 아미타불이며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선에서는 철저히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따로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또 아미타불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군아 동방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동방에 있는 사람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그 세계는 죄가 없습니다. 깨달은 분한테는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불교는 실제로 죄가 없습니다. 이 죄라는 것도 착각입니다. 죄가 없다고 하니까 “함부로 해도 되겠네” 할 수도 있는데 그건 아니지요, 우리의 실제 본질에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 즉 본질에는 죄가 없는데 ‘나다’‘너다’하고 양변을 벌림으로 해서 죄가 성립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업(業)도 성립하고요. 우리의 본래 모습은 그런 양변을 여읜 자리가 우리 본래모습이기 때문에 ‘나다’‘너다’하면서 양변을 여의지 못하고 양변을 갈라놓는 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인 것이지 본래모습은 아닙니다. 그래서 죄라는 것이 본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았거나 깨닫지 못했거나 죄라는 것은 본래 없는데, ‘내가 있고-네가 있고’‘나다-너다’를 갈라놓음으로 해서 죄가 성립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다-너다’를 갈라놓는 그 자체도 착각이고, 그 착각에서 만들어놓는 죄도 착각입니다.

우리는 그런 허상을 잡고 그걸로 인해서 마음 고생들을 많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누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옆에 있는 사람도 학대하면서 다른 사람을 자꾸 원망합니다. 뒤에서 남의 허물 보는 자체만으로도 ‘그건 죄’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본래 죄가 없으니까 함부로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따라서 잘못이 있는 사람을 죄인으로 보고 제도하려는 것보다 “그 사람이 본래 죄가 없는데 착각에 의해서 죄도 짓고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보고 대하는 것도 마음이 편하고 그 사람의 착각을 깨주는데도 굉장히 효과적입니다. 혹시 주변에 잘못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본래 저분이 저런 분이 아닌데 내가 있다 남이 있다고 양변을 벌려놓고 자기에게 집착함으로서 저런 행위가 나오는구나” 하고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이해를 하면 그게 누가 되었든 그분에 대한 미운 생각이 적게 나오고 그 사람을 대하는데도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자기를 보호하는데도 효과적입니다. 본래 죄가 있다고 보고 미운 생각을 내면 미운 생각 자체가 자기도 보호하지 못하고 그 감정이 상대편에 갈 때 그 상대편에 가서 맺어지는 인간관계도 훨씬 더 악화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무리 자신에게 불이익을 줘도 절대로 상대편을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연민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외도가 와서 자신과 견해가 맞지 않다고 하여 부처님에게 욕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결코 미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니까, 그 외도가 스스로 분을 못 이겨서 결국은 부처님 얼굴에 침을 뱉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이 모습을 다 지켜본 아라한이 외도가 가고 나서 부처님께 한 마디 했습니다. “제가 분을 참느라고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아까는 그 사람을 연민했는데, 지금은 내가 그 사람보다 너를 더 연민하게 되는구나”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불교를 이해하게 되면 이렇게 사고가 바뀌고 보는 시각도 바뀌게 됩니다. 반대로 본래 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보면서 증오심을 일으키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증오심을 일으키고 미워하면 그 자체가 자기를 학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요즘 하는 말로 스트레스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저 사람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착각에 빠져서 저렇게 하니까 안타깝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최소한 자기를 학대하지 않고,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보호가 상대편을 대할 때도 그런 마음을 갖고 대하면 그것을 고치는데도 효과적입니다. 그런데 미운 생각을 갖고 비수 같은 말로 찔러대면 상대편도 절대 안 고쳐지고 또다시 반격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뭐냐고 하는데, 우리의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그렇게 하면 반야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나에게도 그렇게 대하고, 또 저 사람에게도 그렇게 대하자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반야입니다. 하지만 존재의 원리를 모르면서 억지로 “미운 생각 내지 말고 연민을 하자”고 생각하면 그건 불가능합니다. 단지 몇 번은 될 지 몰라도 지속적으로 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제 정견을 갖추자, 정견만 갖추면 시각도 바뀌고 사고도 바뀌어서 자기 보호를 하면서도 반야의 힘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연민을 할 때 그냥 하면 안됩니다. 정견을 갖추고 왜 우리가 참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지속적으로 참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정견을 갖추면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육바라밀도 다 실천하게 하는 것이지, 지혜 없이 육바라밀이 절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이 좋은 일인데, 보시라는 것도 지혜를 갖추지 않은 사람이 하면 그냥 좋은 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정견을 갖추게 되면 그 좋은 일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큰 공덕이 돌아가게 됩니다. 그 공덕이 무엇인가 하면 결국 자기를 보호하고 남도 보호하는 그런 공덕이 생기게 되고 그것이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인욕도 정견을 갖추지 않으면 이유 없이 그냥 참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살던 시절에는 참을 일이 많아서 노후에 가슴앓이 하듯 한을 갖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견을 갖추고 지혜를 갖고 참으면 그런 게 없어요. 한이 쌓인다거나 가슴앓이를 한다던가 하는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병이 안 생기지요. 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윤리·도덕을 지킨다고 하면 지속적으로 지켜지질 않습니다. 그런데 정견을 갖춰서 지혜를 얻게 되면 ‘왜 그것을 지켜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게 지속적으로 지켜집니다. 육바라밀이 다 그렇습니다. 정견을 갖추지 못하고 지혜가 없는 육바라밀은 육바라밀이 아닙니다. 지혜가 바탕이 될 때에만 그 육바라밀이 부처님이 말하는 진짜 육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대편을 부처님으로 보고 부처님이 잘못하는 것이니까 용서도 할 수 있고 이해도 할 수 있고 연민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정견을 갖추기 전에는 절대로 안됩니다.

정견을 갖추면 왜 죄가 없다고 하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체험한 분은 어떤 일을 하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날부터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실제 불교가 사회적인 가치가 크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서 저변을 확대시키면 법원에 있는 분들이나 형무소에 있는 분들이 할 일이 없어지는 날이 오게 됩니다.

서방에 있는 사람도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허물이 있게 된다.

아무리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 있더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못해서 ‘나다-너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라고 하는 그 생각을 갖고 있으면 절대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서도 편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물이 있어서 미혹한 사람은 나기를 원하나 동방과 서방은 있는 곳이 다 한가지다.

서방이니 동방이니 하면서 갈라놓는데 그러한 것은 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것이지 본래 그런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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