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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문정왕후

기자명 법보신문

명종 수렴청정하며 불국토 조선 꿈꾸다

유생들 반대불구 승과제도-선교 양종 부활
각종 사화로 유생 탄압…역사에 ‘악녀’기록
불법은 알았으나 탐욕 못 버린 미완성 보살

인간이라면 누구나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한 인물의 인생이 온통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면 그의 이면을 어떻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인가.

조선 최고의 호불왕비(護佛王妃)로 일컬어지는 문정왕후(1501~1565)는 역사서 어디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찾기 힘든 인물이다. 아니, 인간적인 면모라고는 일절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조선 유생들은 그녀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동안, 어느 고을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바뀌었다고 비아냥대는 상소를 네 번이나 올렸고, 실록을 편찬한 사서들 또한 명종이 죽은 후 그녀를 일컬어 ‘아들에게 불선(不善)을 가르친 어머니’라고 가리켰다. 게다가 보우 스님과 봉은사에서 은밀한 연애를 벌이기 위해 일부러 중종의 능을 봉은사 주변으로 이전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였으니, 조선 유생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국모이기는커녕 금수(禽獸)만도 못한 인물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그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조 최악의 왕비, 정부인의 아들을 죽인 사악한 계모, 친아들의 인생을 눈물 속으로 빠뜨린 어머니, 게다가 한술 더 떠 임진왜란의 직접적인 원인을 그녀에게서 찾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이다.

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정미사화, 을사사화를 일으켜 자신에게 반대하는 유생들을 숙청하고, 친아들 명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중종의 정비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을 독살했다. 이처럼 모든 역사서가 입을 모아 악녀로 일컫는 상황에서 그녀의 ‘무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또 불자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참혹하리만치 나쁜 평가를 받았을까.

문정왕후는 분명 삼종지도(三從之道)를 하늘의 이치로 따라야 했던 조선시대에 이단적인 인물이었다. 그녀가 무자비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지언정 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 노력한 여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포커스를 달리해서 본다면, 조선시대는 ‘정당한’ 방법으로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던 시대였다. 그녀가 열일곱의 나이로 중종의 후비로 간택됐을 당시, 이미 중종 주변에는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등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들이 즐비하게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겨우 뒤늦게 아들(후일 명종)을 생산했을 때는 장경왕후 소생의 아들(후일 인종)이 세자로 책봉돼 성년(20세)이 된 이후였다.

남편의 사랑을 기대하기도, 임금의 어머니가 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정적들을 하나둘씩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인종이 재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병사함으로써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낳은 아들을 국왕의 자리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여러 야사(野史)에서는 인종이 서른에 요절한 것을 두고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3일 뒤에 죽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을사사화를 일으켜 인종을 지지했던 김안로와 윤임 일파를 제거한 이후에도 문정왕후는 그녀의 수렴청정을 반대하는 유생들을 유배 보내거나 사사했다.

문정왕후가 유생들에게 욕을 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불교를 깊이 신앙하다 못해 전대 임금들이 폐지했던 불교정책들을 모조리 되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린 명종 대신 수렴청정을 하면서 불교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승과를 부활시켜 시험을 통과한 이에게 정식 신분을 인정해주는 도첩제를 다시 실시했다. 또 양종(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허응당 보우 스님을 국사로 삼아 조선불교의 중흥을 이루어냈다.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봉은사에 유생들의 출입을 엄금시킬 정도로 유교보다 불교를 우위에 두었던 그의 정책들은 호불군주 세조조차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성리학을 목숨처럼 여기던 유생들이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전국의 유생들이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고, 성균관 유생들은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위를 벌였으며, 사간원·사헌부·홍문관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교를 배척하라는 상소가 이어졌다. 양종 부활을 철회하라는 상소가 무려 432회, 보우를 없애야 한다는 계(啓)가 75회에 걸쳐 올라왔다.

암탉이 수탉으로 돌변한 때도 이 무렵이었다. 『명종실록』에서 사관들은 “서울에서 양종을 다시 설립하자 함흥에서는 보우가 발적했고, 서울에서 흰 무지개가 해를 뚫자 함흥에서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 하늘이 이물의 요망함을 보여준 것이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서로 반응을 나타내니 어찌 매우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논평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문정왕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불교중흥정책을 밀고 나갔다. 그녀의 호불정책이 일시적이나마 조선 불교계에 엄청난 기폭제가 됐음은 물론이다. 현존하는 상당수 전통사찰의 사지에 명종대에 중수를 한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 불화 중에서도 문정왕후 발원 불화가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힌다는 사실은 그녀의 호불정책이 조선 불교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어내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음을 반증한다. 조정 대신들의 간섭이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국가정책을 밀어붙인 그녀를 조선시대 유생들이 어떻게 평가했을 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실록』을 집필한 사관들은 그녀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윤씨는 천성이 극악스러웠고 문자를 알았다. 명종이 즉위한 뒤로는 그 아우 윤원형과 안팎에서 권세를 휘둘러 20년 사이에 조정 정사가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워지고 국맥(國脈)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윤씨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역사 기록들의 진실 여부를 떠나, 그리고 불교신앙의 깊이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문정왕후는 권력 지향적이고 냉혹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명종의 후사를 발원하기 위해 무차대회를 준비하던 그녀가 수일동안 계율에 따라 찬물로 목욕재계한 것이 탈이 나 결국 죽음을 맞았다는 실록의 기록은 그녀가 타인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철두철미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삶을 칭칭 옮아맨 여러 기준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려고 한 인물이었다. 궁궐의 뒷방 늙은이로 죽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을 내세워 국정을 손아귀에 넣었으며, 불교를 다시 살리기 위해 어떠한 비난이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호불정책을 밀어붙였다. 그 같은 집념이 결국 자신을 왕의 어머니로 만들었고, 불교를 중흥시켰으며, 조선시대 여인들 중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는 여인으로 거듭나게 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문정왕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것도, 보우 스님이 불교의 중흥을 꿈꾸었던 것도, 정난정이 조선 최고의 여인이 되고자 했던 것도 지나친 ‘무리수’였다. 역사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역류를 꿈꾸었던 이들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했다. 문정왕후는 유생들로부터 최고의 악녀로 평가됐으며, 보우 스님은 제주에서 주살되었고, 정난정은 결국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조차 여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고, 불교를 이단으로 치부하던 조선 유생들의 시각으로 문정왕후를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대정신에 일정 부분 타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김없이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당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다. 문정왕후는 그런 의미에서 시대정신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그에 대한 대가 또한 톡톡히 치른 인물이다. 그녀는 여자로서 삼가고, 왕의 어머니로서 조심하고, 불자로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시대에 이에 반하는 삶을 살았다. 집요하리만치 강인했던 집념과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문정왕후라는 인물은 역사 속에서 그토록 크게 부각되지도, 욕을 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결말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꺾었을까. 모르긴 해도 그의 대답은 NO일 것이다. 최고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는 그 어떤 것으로도 꺾을 수 없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정왕후는 불법의 숭고함은 알았으나 탐욕과 진애를 떨쳐내지 못한 ‘미완성의 보살’이었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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