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심전개발운동의 전개와 불교계의 참여
31 심전개발운동의 전개와 불교계의 참여
  • 법보신문
  • 승인 2007.10.1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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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의 정신 개조 정책…조선의 황국신민화 목표

유학생·불교전문학교 학생 등 친일 지식인 대거 동참
‘불교시보’발행인 김태흡이 가장 열성적…효과는 미비

<사진설명>1935년 7월 중앙불교전문학교 학생들이 전국 순회강연을 떠나기 직전에 찍은 사진 (사진제공=민족사)

1930년대 초반 일본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었다. 1929년에 밀어닥친 미국 경제 공황의 여파로 사정은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일본은 자국의 공황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이고자 지금까지 무제한적으로 들여왔던 조선 쌀의 유입을 제한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당시 동경대학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고 귀족원 의원이 되었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가 천황기관설을 제기하였다. 천황기관설은 종래 인간의 모습을 한 신으로 숭배되었던 천황을 국가 행정기구의 하나로 보아야한다는 학설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학설이었지만 군부와 우익단체들은 천황기관설을 국체에 반하는 불경스러운 이론이라고 공격하였다. 천황기관설의 파문은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고, 미노베의 서적은 발매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검찰은 미노베로부터 자신의 학설이 국체관념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게 하였고, 그는 귀족원 의원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1920년대 초반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공산주의 사상이 점차로 확산되어 이 무렵에는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어있었다. 더구나 1931년부터 1934년까지 국제적으로 반종교운동이 전개되자 일본은 이 영향을 받았다. 반종교운동이란 사회주의 이론인 유물론은 무신론인 까닭에 종교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운동이다.

일본은 ‘경제국난’ ‘사상국난’ ‘외환국난(外患國難)’이라는 3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는 신도·불교·기독교 등 종교를 활용하고자 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여러 가지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는 은체사상(恩諦思想)에 주목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방안은 사상적으로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으로서의 국체관념을 고취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가키 가즈시케(宇垣一成)는 1931년 7월 제6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였다. 내선융화와 조선의 경제부흥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부임한 우가키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매우 좁았다. 조선은 포기할 수 없었고, 조선의 지배계급인 지주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예산은 제약되어 있었고, 경험도 부족하였다. 결국 우가키는 일본의 농촌경제갱생계획을 모방한 농촌진흥운동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1932년부터 조선의 농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이 물질적인 면에서의 갱생운동이었다고 한다면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은 정신계몽운동이었다. 마음의 밭을 의미하는 ‘심전’이란 말은 불교만의 고유한 용어가 아니고 유교 경전인 『예기』에도 나오는 말이다. 결국 불교와 유교 모두 정신수양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총독부가 심전개발운동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조선인들로 하여금 정책에 순응하게 하고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충량한 황국신민을 만드는데 있었다. 심전개발운동은 단순히 외형적인 생활의 개선이 아니고, 생활의 바탕이 되는 올바른 신념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가 불교에 역점을 두고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가혹한 탄압을 받아서 피폐된 상황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부녀자 층을 비롯해서 많은 신도들을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큰 종교라는 점에 착안하였다. 둘째, 조선 승려들의 자질이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가 그들의 지위를 상승시켜주고, 정책적으로 지원해 준다면 심전개발운동에서 지향하고 있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무난한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셋째, 불교는 일본 국가신도에서 중시하는 조상숭배 정신을 거리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종교라는 점이었다. 넷째, 일본이 점령하고자 하는 중국을 비롯한 동양이라는 견지에서 보더라도 불교는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 종교였기 때문이었다.

심전개발운동의 전개는 1935년 1월부터 학무국이 중심이 되어 1년간 연구하여 오던 입안이 구체화되었고, 193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총독부 학무국은 ‘국체관념의 명징(明徵)’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사상 및 신앙심을 함양할 것’ ‘보은·감사·자립 정신의 양성’이라는 이른바 심전개발 3대 원칙을 구체적으로 발표하였다. 불교계가 공식적으로 심전개발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35년 7월 28일부터였다. 이 날 재경 주지들은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모여서 전조선 불교도들을 총동원하여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하고 심전개발운동 촉진 발기회를 열었다. 당시 불교계의 유일한 신문이었던 『불교시보(佛敎時報)』는 심전개발운동의 선전지를 자처하고 나섰다. 『불교시보』는 심전개발운동을 홍보하기 위해서 총독부의 방침과 강연회 등의 일정과 내용을 자세하게 보도하였다. 『불교시보』와 불교계의 잡지였던 『불교』에 나타난 1935년부터 1937년간 전국에 걸쳐 시행된 심전개발 공개 강연의 횟수는 572회였고, 동원된 청중 수는 149,787명이었다.

<사진설명>김태흡이 심전개발운동 순회강연을 하면서 사용하였던 강연집.

강연에 동원된 연사들을 살펴보면 김태흡·박윤진·이지광·김경주·박영희·이동강·배성돈·장원규·임석진·문학연 등 66명에 이른다. 심전개발의 연사들 가운데는 일본에서 유학한 유학생들과 중앙불교전문학교 학생들이 많았다. 학생들이 많았던 까닭은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의 성향이 친일적이었다는 요인을 하나로 들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학생들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름과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이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회 연사로 활동하면서 생기는 얼마간의 수입이 학비에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강연을 한 사람은 『불교시보』의 발행인이었던 김태흡이었다. 그는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사료편찬실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1928년 귀국하여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최초의 포교사로 임용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572회의 심전개발 순회강연 가운데 157회의 강연을 하면서 심전개발운동의 선전자를 자처하였다. 그가 한 강연의 연제를 보면 「심전개발과 불교의 보은 사상」, 「심전개발과 자력갱생」, 「심전개발과 자립정신」 등이다. 이러한 연제는 피폐된 조선의 농촌경제 부흥시키기 위한 농촌진흥운동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지원한다는 심전개발운동의 목적이 충실히 반영되었다는 것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불교시보』 창간사에서 종교 부활·정신작흥·신앙심 고취를 부르짓는 심전개발운동의 한 팔이 되고자 한다고 함으로써 이 신문이 총독부의 정책 선전지임을 천명하였다. 그는 중앙불교전문학교 전임강사로 재직 중이었으나 심전개발운동 선전에 매진하기 위하여 대학교수의 역할을 중단할 만큼 열성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심전개발운동은 1931년 중국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시도하고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본격적으로 대륙 침략을 감행하던 시기에 조선인을 일본인화 하는 황민화정책의 전단계로 입안된 이데올로기 통제책이었다. 이 운동은 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종교계에서 각종 강연회 △강습회 △촉진회 △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전개하도록 한 관제운동이었고, 가능한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자 하였다. 총독부는 종교계를 동원하면서 종교 가운데서도 불교계에 역점을 두고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불교계의 심전개발운동이 그렇게 성공적으로 진행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총독부의 최초 의도는 불교부흥 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총독부는 불교를 가지고는 심전개발운동에 큰 효과를 얻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 이유는 불교계에 위대한 승려가 없다 점, 장차 불교계가 청년 지도자를 양성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불교 부흥은 필요하되 심전개발운동의 중심으로 잡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심전개발운동은 농촌진흥운동과 달라서 단기간에 효과가 수치적으로 나타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상당히 장기간에 걸치는 계속적 시설이 필요하였다. 그 시설이 불충분하다든가 대중생활의 실제를 고려치 않을 경우에 그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정신개발운동이었던 심전개발운동의 결과는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1935년 이후 농촌사회가 상대적인 안정기를 맞이하였다는 점에서 총독부의 기대에는 못미쳤지만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이 두 운동의 성과를 기반으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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