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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29. 공(空)②-경한의 ‘두 마리 진흙 소’

기자명 법보신문

무상한 달을 통해
무상하지 않은 원리
그대로 드러나네

<사진설명>모든 것이 변하여 공하지만 공을 깨닫는 그 순간, 변하는 원리만은 공하지 않음을 안다.

제법 가을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아침에 책상에 자리를 잡을라치면 소매 속으로 깃드는 기운이 차서 소름이 돋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관악은 반년이나 동색이던 초록이 부끄러웠던지 곧 고운 때깔로 새로운 채비를 할 태세다. 며칠만 지나면 저 산도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리라. 장님에게 단풍의 고운 색들을 어떻게 알려줄까. 그에게 아주 고운 빨강 빛으로 물든 단풍잎을 한 다발 가져간다 하더라도 그는 그 빛을 알지 못한다. 다시 붉은 빛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붉은 깃발과 붉은 피와 붉은 사과를 손에 쥐어준다 하더라도 그는 깃발의 보드라움과 피의 끈적끈적함, 사과의 향긋한 향내만 느낄 뿐이다. 우리 모두 장님과 같다. 공(空, 붉은 색)은 알지 못한다. 다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존재의 경계(깃발, 피, 사과)에 휩싸여 그것들의 현상(보드라움, 끈적끈적함, 향긋함)을 그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두 마리 진흙 소가 싸우다 바다로 뛰어드네

두 마리 진흙 소가 싸움하다가
소리치며 바다로 뛰어들더니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들어가
아무리 헤쳐도 소식이 없네

경한의 선시다. 경한(景閑: 1298∼1375)은 고려 말의 선승이다. 그는 중국에서 임제종을 배워와 평생을 선인으로만 일관한 스님이다. 동시대의 선승인 혜근(惠勤)이나 보우(普愚)와 함께 당대 선사상을 대표하는 승려지만, 그는 그들과 달리 간화선(看話禪)을 버리고 무념무심(無念無心)을 통한 무심일도(無心一道)를 추구하였다.

진흙으로 소를 빚었다. 그 소가 풀을 먹을 리도 없고 쟁기를 걸고 일을 할 리도 없다. 그것은 허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삼라만상을 분별하여 본다. 진흙 소는 허상인 줄 알면서도 실제 소는 허상인 줄 모른다. 실재하는 소 또한 스스로 자성을 가진 것도 아니요, 다른 것에 의지하여 드러나는 것일 뿐이니 허상이다.

허상을 좇는 현대인

세계의 어린이는 미국 사회를 매우 폭력적인 것으로 안다. 이는 실제 그런 것보다 미국의 드라마가 폭력 장면을 자주 방영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흑인을 보지 못했던 미국의 어린이가 길가에서 또래의 흑인을 만나면 피한다. 흑인들이 드라마에서 범죄자로 자주 등장하기에 으레 흑인들은 범죄자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드라마와 영화 속의 환상이 오히려 현실을 대체한다. 대중들은 텔레비전 속의 환상을 실제의 삶에서 모방하는 것이다. 드라마에 나타난 사랑을 흉내를 내 사랑하고 드라마나 상업광고에 언뜻 비친 일상생활을 자기의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다. 미국 영화에 나타난 주인공들의 미국식 사랑이 전 세계 젊은이의 사랑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전 세계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미국식으로 사랑하고 성행위를 한다. 얼마 전에 한 청년이 헐리웃 영화의 주인공 흉내를 내면서 자신의 부모님 앞으로 보험을 들어놓고 권총으로 그들을 살해하였다.

이는 극단적인 예일 뿐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생각하는 것이 실은 허상이다. 우리는 모두 진흙 소를 실제 소로 착각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를 실제로 믿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 앞의 존재들을 실제라 여긴다. 진흙 소를 바다로 보내지 못하니 진흙 소가 서로 싸워 세상은 자고 일어나면 살인이고 투쟁이며 대립이다.

그리 분별하고 나누는 생멸문(生滅門)에서는 늘 두 쟁론이 서로 싸운다. 아무리 싸워도, 한 논리나 주장이 다른 것을 이긴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좀 더 나은, 혹은 진여실체에 조금 더 가까울 뿐, 허위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소리치며 바다로 들어간다.
진흙 소가 바다로 들어가면 결과는 뻔하다. 곧 파도에 휩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진흙 소는 부서지고 용해되어 아무런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흙알갱이마저 물고기나 프랑크톤의 밥이 되거나 파도의 포말이 되어 사라져버리고 거기 바다만 존재하게 된다. 그처럼 일심(一心)의 바다, 진여의 바다로 가면 모든 구별과 대립이 사라진다.

파도 속에 시간 구분  묻혀

시간도 마찬가지다. 시작도 끝도 없고 파도를 통해 지극한 끝자락만 보여줄 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가 바로 바다다. 그곳에서 시간은 사라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구분도 사라진다. 시간마저 사라진 곳에서 모든 존재는 공하다. 하지만 공한 그 순간 무엇인가 존재한다. 이것이 공의 역설이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공하다. 우리 앞에 책이 있고 사람이 있고 건물이 있다. 그들 모두 엄연히 우리 앞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기나 다른 것들을 차치하고 시간만 대입시키도 모두 공하다. 책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낱장으로 흩어질 것이고 그마저도 썩어서 공중으로 사라질 것이다. 사람을 보고 누구라 일컫지만 찰나의 순간에도 수 백, 수 천의 세포가 바뀌고 있으며 그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흙이 되고 결국 먼지가 되고 우주의 구성성분이 된다. 건물도 마찬가지다. 책, 사람, 건물 모두 진흙소일 뿐이고 진흙소가 바다에 용해되어버리듯, 진흙소에 비하여 실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시간 하나만 대입해도 찰나에 사라져버리는 것들이다. 바다에 모든 것이 묻히고 녹고 사라져버리듯 일심에서 보면 모든 것이 공하다. 하지만, 거기 모든 것을 공하게 하는 바다는 분명 있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제자 승조(僧肇: 378-414?)는 『조론(肇論)』에서 물불천론(物不遷論)을 편다. 일반 사람들은 “사물은 움직이며 고요하지 않다(動而非靜)”라고 말한다. 그렇듯 옛날엔 젊은 얼굴이었는데 이제 늙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처럼 “사물은 움직이며 고요하지 않다”한 것은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흘러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젊은 사람의 얼굴이 현재의 늙음으로 옮겨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굴이 비슷하다 느끼지만 그 당시 있었던 세포는 수 조 개중 하나도 없다. 젊은 얼굴이 현재의 늙은 얼굴에 없으므로 과거의 것이 현재로 흘러 온 것이 아니다. 늙은 얼굴이 일찍이 과거의 젊은 얼굴에도 없었으니 현재의 사물이 과거로 흘러간 것도 아니다. 그러니 현재가 과거로 간 것도 아니요 과거의 사물은 스스로 과거에 있었고 현재로부터 과거로 간 것은 아니다. 현재의 사물 또한 과거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재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승조는 “사물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靜而非動)”라고 말한다. 현재는 현재이며, 현재의 사물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바다에 진흙소가 빠져 사라져야 진흙소가 허상임을 알고, 그 순간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무시무종의 바다를 깨닫는다. 그렇듯 모든 것이 변하여 공하지만 공을 깨닫는 그 순간, 변하는 원리만은 공하지 않음을 안다.

모든 것 空 , 원리는 그대로

다음 날 달이 다시 떴다. 스승은 다시 물었다. 저 달이 무엇이냐고. 어제 반달이라 답하였다가 혼난 사미승은 대답하였다. 온달이라고. 스승은 그런 제자에게 일갈을 한다. “예끼! 너는 왜 반달로 보이는 것을 온달이라 거짓말 하는가?”라고. 반달은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어, 찰나의 순간에도 보름달이나 그믐달로 변해가는 중이라 공하나 어두운 부분을 통하여 밝은 부분이 드러나고 밝은 부분이 있어 어두운 부분이 나타난다. 드러나고 감추는 것이 서로 조건이 되는 그 무상하지 않은 원리는 무상한 반달을 통해 나타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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