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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떠나 불교 찾는 건 토끼 뿔 구하는 것

기자명 법보신문

21. 서방(西方)
 

<사진설명>육조 혜능 스님의 탄생지이자 열반지인 국은사에는 스님의 발원으로 지은 대탑이 있다. 지금도 스님의 법향을 따라 국은사를 찾는 향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부처는 자성이 짓는 것이니 몸 밖을 향해 구하지 말아라. 자성이 미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고 자성을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다.

우리가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은 다 자성이 짓는 것이지, 밖에서 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 밖을 향해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은 우리가 이름을 그렇게 붙여 놓은 것이지 그것이 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본질자리, 즉 자성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자성자리만 보면 부처라 하던지 중생이라 하던지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건 단지 이름을 붙여놓은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자성자리를 보려면 우리의 정신이나 육체가 연기로 만들어져 있고, 그것은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도 오온이 공이라고 했습니다. 연기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입니다.

자비는 곧 관음이요. 희사는 대세지라고 이름한다. 능히 깨끗한 것은 석가이고 평등하고 곧은 것은 미륵이다. 인아(人我)는 수미산이고 삿된 마음은 큰 바다이며 번뇌는 파도요 독한 마음은 악용이고 진로는 고기와 자라이며 허망한 것은 귀신이고 세 가지 독한 것(三毒)은 지옥이고 우치(愚癡)한 것은 곧 축생이며 열 가지 선한 것은 천당이다. 인아가 없으면 수미산이 스스로 무너지고 사심(邪心)이 제해지면 바닷물이 말라버리고 번뇌가 없어지면 파랑이 없어지며 독해(毒害)가 제해지면 고기와 용이 끊긴다.

우리가 흔히 자비·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데, 관세음보살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서 연민하는 것이 바로 자비이고 연민하는 마음이 관세음보살입니다. 인아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인상으로 나누어 보지 않고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너나-나다’하는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은 수미산이고, ‘있다-없다’하는 것을 믿는 사심은 큰 바다입니다. 이러한 것들 모두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비유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마음에 일어나는 선한 마음도 나쁜 마음도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제하고 나서 평화로워지는 것도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해서 마음을 닦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닦을 것이 있어서 걸레를 가지고 무엇을 닦듯이 닦아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과 본래 연기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하는 본질을 보는 것을 우리는 닦는다고 합니다. 착각을 바로 정견으로 바꾸면 그것이 닦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닦는 것은 걸레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착각만 깨면 됩니다. 그래서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바로 눈앞에 갔다 놓고 보여주는 법문도 하셨고, 그 다음에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좋은 마음 나쁜 마음 이런 것을 다 비교하셨습니다. 이것이 모두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하는 본질을 보면 이렇게 복잡하게 이해하지 않아도 여기 있는 내용과 똑같이 닦는 것입니다.

스스로 마음의 땅 위에 각성 여래가 큰 지혜를 놓아서 광명이 밝게 비추어 육문(六門)이 청정해지고 육욕제천(六欲諸天)을 비추어 파하고 아래로 비추어 삼독을 제하면 지옥이 일시에 소멸되어 내외가 명철해서 서방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마음 땅 위에 각성 여래가 큰 지혜를 놓는다고 하니까 거창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맑은 거울을 보면 거울에 비추는 성격이 있지요, 그것이 대 지혜를 놓는 것입니다. 그 비추는 성격이 없으면 앞에 물건이 지나가더라도 비추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비추는 성격이 있기 때문에 비추어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거울의 바탕인 체입니다. 그리고 비추는 성격이 있고요, 다음은 앞에 붉은 것이 있으면 붉은 것을 비추어 나타나고 흰 것이 오면 흰 것을 비추어 나타나서 작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심지상에 각성여래가 대지혜를 놓는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거울처럼 깨끗합니다. 깨끗할 뿐만 아니라 비추는 성격도 있는데, 우리는 왜 그것이 드러나지 않느냐 하면 ‘내가 있다’는 생각, 즉 집착에 빠져가지고 해가 어두운 구름에 가려서 나오지 못하듯이 그걸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다는 것,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기 때문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체험을 하게 되면 맑은 거울과 같게 됩니다.

다음에 육문을 깨끗이 해서 육욕제천을 파해 없애고 아래로는 삼독을 제한다는 것은 희고 붉은 것을 비추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악마가 비춰도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나쁜 것이 나타날 때 내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해서 대응책을 만드느라고 분주하게 분별심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대상도 나도 공하여 분별심으로부터 벗어나 여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입니다.

그리고 내외가 명철해진다는 말은 나도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자기를 안으로 밝게 하는 것이고 좋은 것이 나타나든 나쁜 것이 나타나든 밖으로 나타나는 것도 역시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이 밝게 사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게되면 있는 곳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이고 있는 것마다 다 부처님이지요. 거기에는 따로 악이나 선이 없고 죄도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내가 있다고 착각해서 그 욕망 때문에 자기를 학대하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느 시대보다 도닦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반면에 이 시대만큼 도를 필요로 하는 시대도 없습니다. 모두들 너무나 이기적으로 살기 때문인데, 이 이기심을 없애지 않으면 정말로 잘 살기가 어렵습니다. ‘나’라는 것을 없애고 나면 개인보다 공적이고 전체를 앞세워서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길을 가게 됩니다. 사회가 어려워지고 혼란스러우면 혼자서 잘 살려고 해도 항상 불안하게 됩니다. 어느 시대보다 불교이야기가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에 여러분도 육조 스님을 통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배워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개인적으로 생활화하고 사회화하는데도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절대로 혼자 잘사는 시대가 아닙니다. 모두가 더불어서 함께 사는 세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특히 개인의 생활화도 중요하지만 사회화 역시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닦음을 짓지 아니하고 어떻게 저(피안)에 이르리오.

그러니까 우리가 양변을 여의고 실체가 없다고 하는 그 닦음을 짓지 아니하고는 어떻게 저에 이르겠는가 하는 말인데, 여기서 저는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말합니다.

법좌 아래에서 설명을 듣고 찬탄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되 응당 미한 사람도 밝게 문득 본다.

육조 스님이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봐라’ 해서 한 번 보였고, 다음에 설명해서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미혹한 사람이 그걸 봐라 했을 때 못 보았어도, 이 설명을 듣고 밝게 봤다는 말입니다.

사군이 예배하고 찬탄해 말하되,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널리 원컨대 법계 중생이 듣고 일시에 깨달아 지게 하여지이다.

그 당시도 도인들은 다 그렇게 불교의 사회화에 노력했습니다. 원력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 수행도 더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부터 자기 혼자만 공부하고 다른 사람에게 포교하지 않는 것을 소승이라고 하고, 후대에는 소승외도라고 까지 했습니다. 육조 스님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에 이미 사회화하는데 굉장히 힘쓰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시고 그랬습니다. 방금 말한 대로 이 시대가 가장 요구하는 법이기 때문에 사회에 알리는데 많은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또 알리려면 자기부터 알고 자기도 시각을 바꾸어 삶을 살아보고서 좋으면 알리는 행위를 더 열심히 하게 되거든요. 수행도 열심히 하시고 알리는 일도 열심히 하시면 우리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잘사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22. 수행(修行)

대사가 말하되 선지식아 만약 수행하고자 할 진대는 재가에 있어도 또한 가능해서 절에 있음을 말미암지 아니함이니.

꼭 절에 있어야만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활을 떠나서 불교를 찾는 것은 바로 토끼 뿔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활을 떠나서는 불교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방불교보다 우리가 조금 더 수승하고 수행방법이 좋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티베트의 경우 평생 안 먹고 안 쓰고 돈을 모아서 포탈라궁으로 오체투지를 한 번 갖다 오는 것이 원력이에요. 그런데 우리 대승불교에서 재가에서 공부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포탈라궁이 바로 여기 있는데 뭐 하려고 거기까지 가느냐 하는 말입니다.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있는 그 자리 그 시간에서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이 옳지요. 포탈라궁에 갖다와도 또 수행하잖아요, 그리고 평생 왜 안 먹고 안 씁니까. 쓸 것은 쓰고 먹을 것은 먹으면서 수행해야지요. 불교는 절대 고행이 아닙니다. 불교를 이해하면 즐겁고, 우리가 닦으면 닦은 것만큼 즐겁습니다. 나중에는 견성하지 않아도 그렇게 사고하지 않고 닦지 않으면 괴롭습니다. 그것은 별거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다고 생각해서 누가 나에게 욕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고 괴롭지요.

하지만 부처님 말씀을 상기해서 내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내가 없는데 욕을 하거나 말거나, 욕을 해도 나하고는 상관이 없지요. 내 허상을 보고 욕하는데 같이 놀아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연기’만 이해하면 누구든지 그렇게 됩니다. ‘내가 없는데 네가 나한테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난 괜찮다. 상관없다. 오히려 니가 더 안타깝다’고 보면 그것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행하지 않으면 괴롭다는 말이 맞잖아요. 그래서 불교는 절대 고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갈비뼈만 남아 있는 고행상은 부처님이 깨닫기 전에 이 몸이 욕망을 일으키니까 몸을 학대하면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해서 고행을 했던 것입니다. 그건 부처님이 깨닫기 전 고행할 때 모습인데, 불교가 왜 고라고 자꾸 말합니까. 삼법인도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인데 요새 스님들은 ‘일체개고’라고 합니다. 그건 모를 때 말이지 깨달은 다음에 고가 어디 있어요. ‘열반적정’이 맞습니다. 불교는 절대로 고행이 아닙니다. 수행을 하더라도 즐겁게 수행하고 즐겁게 살면서 먹을 것 먹고 쓸 것 쓰고 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낭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나도 귀중하고 물건도 상대도 모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지혜롭게 잘 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인색해도 괴롭고 낭비해도 괴롭습니다. 그런데 지혜롭게 잘 쓰는 사람은 쓰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됩니다. 불교를 고행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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