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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장치로 확인된 찬란한 백제 공예 기술

기자명 법보신문

강순형 창원문화재연구소장 특별 기고
왕흥사-사리장치 깊이보기

백제 사비시대의 비밀을 품고 있는 왕흥사지에서 1400년 전의 보물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사찰 창건시기가 새겨진 사리함과 금제사리병 등을 갖춘 사리구 등 백제인들의 찬란한 예술혼이 담긴 8000여점의 유물들이 드러나자, 고대사학자들은 백제금동대향로 이후 최대의 발굴성과라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백제사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로 주목받고 있는 왕흥사지 출토유물. 여기에 담긴 비밀을 불교미술사학자 강순형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장이 상세하게 소개한다.   
 
편집자주

글 순서

1. 최고·최대 사리그릇 발굴하다
2. 왕흥사, 임금이 배타고 들어가는 구조
3. 언제 창건 되었나-위덕왕 때 창건?

4. 아좌태자 외 역사에 없는 또 한 왕자
5. 사리 그릇 차림새
6. 유리병 대신 순금 사리병
7. 사리장치처의 궁금증
8. 금은보화들-진단구? 공양품?
9. 세알의 사리는 어디로 갔나?
10. 40여 종 최고의 세공품들
11. 기타 출토품들
12. 위덕왕이 세운 두 절과 사리공양

<사진설명>왕실의 원찰 왕흥사는 백제 사비성 북쪽 백마강 건너 1㎞에 위치해 임금을 비롯한 모두가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다.

1. 최고·최대 사리그릇 발굴하다

충남 부여 백제시대 왕흥사王興寺 목탑터에서 나온 찬란한 사리그릇과 수많은 색색의 구슬과 각종의 공양품이 즈믄해-1,400년이 넘도록 그대로 온전하게 봉안되어져 오다 발굴되어 경탄을 자아내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삼국시대 사리장엄이 처음으로 그것도 고스란히 나온 때문이다. 무려 30여종에 8,000을 헤아리는 점수.

더구나, 임금의 이름과 절(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는 연유와 정확한 절대연대를 알려주는 5자6행29자의 명문까지 나타나있어 더욱 그 가치가 돋보이는 것이다.

문화재청(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발굴조사에 따른 유물 모두를 지난 10.24(수)에 공개하여 언론의 대서특필을 받았다.

손 타지 않은 사리갖춤 유물이 나온 왕흥사는 사비성터인 부소산성 앞 백마강 건너의 강변에 자리한 절터. 1934년에 「王興」이라 찍힌 기와조각이 드러나면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그 유명한, 임금이 배타고 들어가는 백제 왕흥사王興寺터로 자리잡았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0년부터 발굴조사하고 2001년에는 사적(427호)이 되었다. 2007년 올해 4월에 목탑터가 파악됐다. 이어 7월에 장마를 맞아 목탑터 가를 아우르는 물빠짐 길을 다듬다 마침내 유물이 들어있는, 땅 밑 50㎝에 네모난 돌바닥-목탑의 중심 주춧돌인 심초석心礎石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장마철을 넘겨 다시 덮었던 심초석을 열어 빛을 발한 게 10월 9일.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8)이 죽은 왕자를 기려, 정유 577년 2월에 사리를 모시고 절(목탑)을 세운다는 글이 새겨진 사리그릇이 발굴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임금의 이름이 새겨진 사리유물이 나온 것은 겨우 2㎞ 밖에 떨어지지 않은 남쪽 능산리의 능사陵寺터에서 1994년에 발굴한, 같은 위덕왕이 세운 목탑터에서 나온 567년의 사리돌함石龕과 함께 둘뿐인 것의 하나다. 더구나, 둘 다 위덕왕의 이름인 「昌」!

한편, 국보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 또한 능사터 사리돌함의 20m 거리에서 한 해 앞인 1993년에 발굴되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따라 600년(법왕2)년에 시작하여 634(무왕35)년에 완공落成된 절로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이미 그 앞 577(위덕왕24)년에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10해 뒤의 같은 위덕왕에 의한 능사(567)와 함께 최고의 자료가 되었다.

왕흥사의 15m 높이로 여겨지는 대단한 목탑(3×3칸, 14×14m)은 사라지고 없지만, 네모난 심초석(100×110㎝)의 남쪽 끝단 윗면에다 긴 네모로 판 사리홈(16×12×16㎝) 속에 청동합이 담기고, 그 속에 다시 은호, 금사리병 차례의 빛을 밝게 발하는 3겹 사리그릇을 봉안하고는 사다리꼴의 화강암 뚜껑을 덮은 차림새를 그대로 발굴하여 공개하였다. 그릇들은 모두 이른바 보주寶珠형 꼭지가 달린 뚜껑이 덮였다.

석함까지 치면 돌←청동←은←금 재질의 4겹重으로 차려진 가장 기본적인 사리그릇 차림새가 그대로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다른 어떤 것도 담겨있지 않았으며(외사리합에 오직 아주 작은 구슬 하나뿐), 3알이었다는 사리는 1알도 금사리병에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사리그릇에는 맑은 물이 (들어와?) 담겨있었다.

달리, 보통 진단구鎭壇具라 부르는 공양품供養品들이 심초석 윗면과 높이를 같이하는 남면쪽 흙 속에 수없이 깔려있어 탄성을 자아내었다. 목걸이, 팔찌류, 옥비녀, 금귀고리, 쇠칼노리개와 장신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색색의 크고 작은 구슬들과 족집게 및 금·은·옥·금동·옥제품 및 관모冠帽철장식, 운모雲母로를 너무나도 얇게 저며 만든 6잎 연꽃을 비롯해 진묘수鎭墓獸같이 생겨난 조그만 짐승(호랑이?)장식들 심지어, 중국 남북조 때 북제의 동전인 상평오수전(550­577)같은 무려 30여종 8,000여 점이 나온 것이다.

이들은 모두 실용품으로, 사리봉안에 참여한 왕족급 남녀들이 다투어 자비희사慈悲喜捨한 공양품이다. 이로써, 당시 뛰어난 세공기술의 우수성 뿐만아니라, 백제 장신구와 귀금속의 내용을 통한 미술사적 및 대외교류 관계 등의 연구에 중요 자료가 된다.

아다시피, 백제는 중국 교류 아래 성왕 때의 영향과 위덕왕 때의 사리 및 승려와 장인匠人을 보내는 불교문화의 일본전파에 큰 역할을 함과 더불어, 이러한 사리그릇과 공양품들은 백제 불교문화의 우수성과 동아시아적인 국제성을 잘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밖에도, 동서방향의 석축과 목탑 둘레에서 백제와 고려 때의 많은 암기와와 연화문수막새, 연목막새 및 치미편들이 나와 훌륭한 건축 편년자료가 된다.

하여튼, 사리그릇 명문에 의한 분명한 절대연대가 밝혀짐으로써, 백제사와 불교사 편년과 고고학·미술사학적 연구의 중요 전기를 마련할 뿐 아니라 좁게는 위덕왕 시기의 정치·사회·문화의 내용과 흐름 살필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한 수확이 너무나 크다.

2. 임금이 배타고 들어간 왕흥사

<사진설명>청동사리 그릇에 새겨진 5자6행29자의 명문. 임금의 이름과 절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한 연유와 정확한 절대연대를 알려주어 그 가치가 돋보인다.

화려·정교한 사리사림새사리裝置가 나온, 미륵사彌勒寺라고도 부른 나라와 왕실의 원찰願刹 왕흥사王興寺는 백제 사비성泗城에서 북쪽 백마강白馬江을 건너는 1km 거리에 있다. 구드래나루에서 70m 너비를 건넌 강변에 서 있는 것이다. 곧, 강 건너에 세워진 절인 것이다.

때문에, 임금을 비롯, 모두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다. 이를, 당시의 기록들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법왕이 2년(600) 봄 1월에 왕흥사를 창건하고 승려 30을 건너가 있게 했다(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三國史記』, 百濟本紀5, 法王쪽). 곧, 법왕이 경신년(600)에 30승려를 건너가 있게하여, 당시 도성인 사비의 왕흥사를 창건할 때 시작만 하다 돌아가니, 무왕이 즉위하여 아버지 뜻을 이어 수십 해 지나 완성落成하였는데 미륵사라고도 한다.

이 절은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는 자리로, 화목이 빼어나고 4계절이 아름다워, 임금이 자주 배를 대게 하여 타고 강 건너 절에 가 그 좋은 경관을 감상했다(明年庚申 度僧三十人 創王興寺 於時都泗城 始立裁而升假 武王繼統 父基子構 歷數紀而畢成 其寺亦名 彌勒寺 附山臨水 花木秀麗 四時之美具焉 王每命舟 沿河入寺 賞其形勝壯麗 :『三國遺事』, 권제3, 興法, 法王禁殺쪽).

▶무왕 35(634)년 봄 2월 왕흥사가 완성落成되었다. 임금은 자주, 물가의 절이라 배를 타고 들어가 향을 피워 올렸다(三十五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王每乘舟 入寺行香 :『三國史記』, 百濟本紀5, 武王쪽).

▶의자왕 20(660)년 6월 왕흥사 승려들은 모두, 돛배가 큰물을 따라 절문으로 들어옴을 보았다(二十年 六月 王興寺衆僧皆見 若有船楫 隨大水 入寺門 :『三國史記』, 百濟本紀6, 義慈王쪽).

▶태종무열왕이 7년(660) 11월 5일에 계탄을 건너 왕흥사 잠성을 쳐, 7일만에 이겨 700명 머리를 베었다(七年 十日月 五日, 王行渡灘攻王興寺岑城, 七日乃克, 斬首七百人 :『三國史記』, 新羅本紀5, 太宗武烈王쪽).

더구나, 이번 발굴을 통하여 또 사리차림새가 나온 목탑터 앞 어칸御間 앞으로 길게 뻗어나간 임금(등)이 거동擧動하는 어도御道 곧, 답도踏道로 보이는 길이 62m, 너비 13m의 돌 축조시설이 단을 지며 강 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길을 실제로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곧, 그 끝에다 배를 대고 바로 절 경내로 들어가는 접안시설이 마련된 것임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3×3칸의 목탑은 사라지고 없지만 법주사 8상전처럼, 15m나 되는 3∼5층 높이로 솟은 장대한 목탑이 배타고 건너며 대하는 강변에 우뚝 선 절의 장관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3. 위덕왕 때 창건 되었나?

이번에 공개된 청동사리그릇에 새겨진 명문銘文자료를 분석하여 문화재청(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은, 「그동안의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한, 600(법왕2)년에 축조되고 634(무왕35)년에 낙성되었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는 577(위덕왕24)년이다」라고 밝혔다.

곧, 5자6행29자의,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을, 「정유년(577, 위덕왕24)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 이름)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라 해석하면서 말한 것이다.

어쨌거나, 사비의 왕흥사王興寺가 그동안의 600-634년의, 사비 곧, 부여로 천도 온(538) 성왕에서 혜왕(위덕왕 아우)-법왕-무왕을 잇는 계통에서, 더 앞선 577년의 큰집인 성왕-위덕왕(성왕 맏이)계의 등장이 먼저 주목된다 하겠다.

더구나 이는, 왕흥사에 처음부터 묻혀 있어온 사리그릇에 새겨진 내용이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곧, 왕흥사는 처음에 위덕왕(威德王 525-598)이 일으킨(577) 것이다.

그러므로, 「정유년(577, 위덕왕24) 2월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 바로, (목)탑(의찰주刹柱)을 세우며 본 사리 2알枚을 묻을 때-봉안奉安하려고 보니 신기한 조화로 3알이 되어 있었다」로 해석해야 한다. 그 찰주刹柱 아래 곧, 탑 위로 솟게 세운 찰주의 아래인 탑 안의 심초석에 사리를 넣었다는 말이다.

실제 이번 발굴에서 나타난, 땅 밑 심초석心礎石의 윗면 남쪽에 치우쳐 파여진 사리공에 사리 그릇이 나온 것이다.

위덕왕이 처음 왕흥사를 세우게된 건 맞으나, 더 정확히 말하면 신라「황룡사찰주본기黃龍寺 刹柱本記」처럼 모든 목탑을 세우는 중심 속기둥心柱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왕흥사 사리그릇 명문에나오는 「立刹입찰」은 찰주를 세우며 사리를 봉안하고 탑을 세움을 말함이다. 물론, 위덕왕이 탑 전체를 완성 못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아는 이름이 창昌이었던 위덕왕은 고구려와 싸움에서 1:1로 맞붙어 적장의 목을 벨 만큼 강하고 사병과 침식을 같이하는 정감있는 이다(일본서기日本書紀). 30살 태자로서 554년,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에서 신라와 싸울 때 달려와 아들 도우던 아버지 성왕의 죽음을 본다.

이 충격으로 출가-불도를 닦으려 했고(일본서기), 임금이 되어선 한풀이로 신라와 자주 싸웠다. 그리고는 여기서 보듯(명문) 왕자까지도 잃어, 명복을 비는 찰주를 세우며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부왕父王이 죽자 신하들에게 넘어간 권력을 되찾기 위한 왕권의 흥융을 위해 이름마저 왕흥사로 하여 창건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고 보면, 바로 맏이-장남인 위덕왕이 세우던 절임을 곧, 왕실과 나라를 일으키자는 미래지향적인 왕흥사이자 미륵사인 것이다.
위덕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 아닌 아우(혜왕)가 오르면서 그의 아들 손자로 이어져 갔다. 여전히 불안한 나라 탓으로 왕흥사의 진척은 어찌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시말해, 목탑은 언제 완성落成 되었는지, 금당이나 강당 등은 또 누가, 언제 처음과 끝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아마도, 정세가 하 어지럽기 때문에 그 뒤로 惠王계에 의하여 실록대로 23해 차이가 나는 600(법왕2)년에 제대로 불사가 이루어져가고, 634(무왕35년)해야 완성落成에 한 것으로 또는, 실제 그리 된 것으로 보는 게 바람직 한 것이다.

2알의 사리가 3알로 되었음은, 불교에서 늘 이르는 사리분신分身으로, 공덕功德에 따르는 사리영험靈驗을 말하는 바로, 종교적인 신이新異를 말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리하여 봉안할 때 보니 3알이 되어 있었지 넣었다가 (언젠가 열어보니)보니 3알이더란 해석은 안되는 것이다. 한편, 「신화神化」는 『주역周易』, 「계사繫辭」편에 나오는 말로 알려져 있다.

글씨는 또한, 위덕왕이 앞쪽 2㎞ 거리에 있는 바로, 10해 앞인 567년에 능사(터陵寺址-백제대향로도 나온)에 세운 같은 목탑에서 나온 사리돌함石龕에 새겨진 명문과도 비교가 되는 같은 예서체이나 보다 거칠게 새겨졌다. 남북조풍의 서예교류 자료로서 소중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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