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창씨개명과 불교계의 반응
35 창씨개명과 불교계의 반응
  • 법보신문
  • 승인 2007.11.1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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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집행부가 창시개명 주도…친일 행각도 절정

31본사 주지 빠짐없이 개명…불교잡지 등 언론 통해 절차·방법 자세히 소개
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은 ‘히로다 쇼히쿠’…불교계 절반 이상이 개명 참여

<사진설명>창시개명 서류를 법원에 제출할 것을 촉구하는 전단.

우리 민족에게 성과 이름은 생명의 근본 줄기로 인식되어 자신이 어느 혈통 집단에 속하느냐는 정체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긍심의 상징이다.

우리 가족제도에는 불변의 법칙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사람의 성은 일생동안 바뀌지 않는다. 이것은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외국과는 구별된다. 둘째, 동성불혼이다. 혈통이 같은 사람끼리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셋째, 성이 다른 사람은 양자로 들이지 않는다. 이처럼 신성하게 지켜오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는 창씨개명은 일본이 나라를 세운지 2600년이 되는 1940년 기원절인 2월 11일을 맞이하여 그 날부터 그 해 8월 11일까지 1차로 기한을 정해서 실시하였다.

우리의 성과 일본인의 씨는 개념이 다르다. 우리의 성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것이지만 일본인의 씨(氏) 개념은 가(家)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성이 일가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씨는 종족이나 부족은 나타내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내의 성이 아버지와 남편의 성과 다르지만 씨를 창설하면 전 가족의 씨는 같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씨의 칭호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자(壻養子:데릴사위)를 인정하되 양자는 양가의 씨를 따른다. 성이 다른 이성의 양자를 인정하되 양자는 양가의 씨를 따른다는 것이다.

이 중심이 되는 것이 씨설정(氏設定)으로 이것이 바로 창씨개명이다. 창씨개명을 시행하기 위하여 총독부는 두 건의 제령을 공포하였는데 그것은 1939년에 공포된 제령 제19조 ‘조선민사령 개정 건’과 제령 제20호 ‘조선인 씨명에 관한 건’이었다.

총독부가 창씨개명 정책을 실시하게 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조선의 가족제도를 일본화 함으로써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내선일체 정책이다. 다른 하나는 장차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할 경우 일본 군대 내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이름이 다를 경우에 파생되는 이질감을 해소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창씨개명이 시작되자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성이 바뀐다’ 또는 “성이 없어진다‘는 소문에 놀라 신고를 하기를 꺼렸다. 총독부는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 사람이나 외국에 살고 있으면서 일본식 가명을 쓰고 있는 사람 그리고 조선에 살면서 일본식 이름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수용하여 일본식 씨를 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실시한 후의 실제로 나타난 상황은 총독부의 기대에 못 미쳤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전국 호적총수는 4,282,754호였는데 2월 중에 창씨를 제출한 호수는 15,746호로 전체의 0.36%에 지나지 않았고, 6개월의 절반이 되는 5월 20일에 326,105호로 겨우 전체의 7.6%라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당황한 총독부는 후반부 3개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통하여 강제로 밀어 붙였다. 그 결과 창씨개명을 한 호수는 3,200,116호로 79.3%에 달하였다. 총독부는 8월로 창씨개명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이후라도 언제든지 희망하는 자는 창시할 수 있다는 여운을 남기고 이 무리한 작업을 일단락 지었다.

총독부는 창씨를 하지 않는 자의 자녀에게는 학교에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고, 각 행정관청에서는 사무취급을 거부하였으며, 더 나아가 식량과 그 밖의 다른 물자를 배급받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식 성명으로 우송된 화물의 수송이 전면 금지되는 등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극심한 탄압을 가했기 때문이다. 창씨하지 않는 호주는 ‘비국민’ ‘후테이센징(不逞鮮人)’의 낙인을 찍어 노무징용의 우선대상으로 삼았다.

<사진설명>31본사 주지들의 창시개명 현황.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불교계의 창씨개명 상황 역시 비슷하였다. 1940년 총독부에서 파악한 통계에 의하면 전조선의 승려 수는 6,600여명이었다. 이 가운데 창씨개명을 한 승려 수는 3,359명이었으니 과반수를 넘어선 숫자이다. 당시 교계를 주도하고 있던 총본산건설사무소에서는 1940년 6월 17일 창씨개명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무료 상담소 설치·운영과 수속사무를 대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교계의 신문과 잡지에는 창씨개명의 절차와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1940년 6월 『불교(신)』 제24집에는 31본사 주지 가운데 13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과 일본어 발음을 게재하였고, 『불교(신)』 제26집에는 13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을 소개하였다. 1940년 12월에 발간된 『불교시보』 제65호에 누락된 4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본사는 31개이지만 평안도의 영명사와 법흥사의 주지는 한 사람이 겸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본사 주지는 30명이었다. 결국 1940년 연말까지 본사 주지들은 모두 창씨개명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41년 총독부는 보다 효과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불교계의 통일기관인 조선불교 조계종의 창립을 종용하였다.

이 조계종은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의 전신이며 일제 말기에 불교계의 친일 행각을 지휘하였다. 초대 종정 방한암은 불교계의 상징적인 존재이며 오대산 상원사에 칩거를 하고 있었으나 그 마저 산천중원(山川重遠:야마가와 쥬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불교 조계종의 주요 간부들은 모두 일본식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종무총장 이종욱은 광전종욱(廣田鍾旭:히로다 쇼이꾸)로 창씨 개명하였다. 그는 일본이 1944년부터는 조선인에게도 징병제를 실시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불교 잡지에 「징병제 실시의 영(榮)을 예대하고」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그는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군에 입대할 수 있게 된 것은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시동인(一視同人)이 잘 시행된다는 것으로 기쁜 일이라고 하였다.

내선일체란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은 종족이라는 설이며, 일시동인이란 일본 천황이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 같이 취급한다는 뜻으로 황민화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현실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결코 같은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봉급은 대략 3배 정도 차이가 났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이 받는 봉급의 3분의 1밖에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잔심부름과 궂은일은 조선인이 도맡아 해야 했다.

조선불교 조계종의 종정과 종무총장에 이어 주요 간부들도 모두 창씨개명에 참여하였다. 교무부장이었던 임석진은 하야시 겐기찌(林原吉)로 서무부장이었던 김법룡은 가가와 호류(香川法龍)로, 재무부장이었던 박원찬은 아라이 엔산(新井圓讚)으로 창씨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계의 인사들도 모두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혜화전문학교 교수였고, 해방 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던 권상로는 안토 소로우(安東相老)로, 중앙불교전문학교 학감을 지냈던 김경주는 가네야마 게이쥬(金山敬注)로, 1944년 혜화전문이 폐교될 때까지 재직하였던 김두헌은 쯔루야마 아키라(鶴山 憲)으로 창씨개명하였다.

혜화전문 교수를 지내고 해방 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학장을 지낸 김동화는 가네가와 도까(金河東華), 조선후기 승려들의 군역문제를 해명하고, 『한국불교사』를 저술하였던 우정상은 단장 사다미(丹山貞相)으로 성을 바꾸었다. 역시 혜전 교수를 지내고 해방 이후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조명기는 이와 아키모토(以和明基)로 창씨개명하였다. 이 밖에도 중앙불교전문학교 전임강사를 지내고 심전개발 순회강연의 명연사였으며, 당시 불교계의 신문인 『불교시보』의 편집 겸 발행인이자었던 김태흠은 가네야마 다이지(金山泰洽)로 창씨개명하였다.

이처럼 불교계는 교단의 집행부와 학계 할 것 없이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성씨를 바꾸는 창씨와 이름을 바꾸는 개명 작업에 동참하였다.

창씨개명을 하였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친일파라고는 말 할 수 없다. 창씨개명은 일제시기에 지배권력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봉에 서서 창씨개명을 선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과 이름을 바꿀 것을 강요한 사람들의 죄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동족으로 하여금 오랜 전통을 가진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고, 일본인의 하수인이 되기를 강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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