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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록 깨닫는다’는 가르침엔 頓·漸이 없다

기자명 법보신문

22. 수행(修行)

<사진설명>육조 혜능 스님의 행화 도량인 조계 남화선사 대중 스님들이 예불 시간에 맞춰 대웅보전으로 향하고 있다.

절에 있어서 닦지 아니하면 서방에 마음이 악한 사람과 같고, 재가에서 만약 수행하면 동방에 있는 사람이 선한 것을 닦는 것과 같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으면 서방정토에서 닦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마음이 악한 사람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선한 것도 ‘선하다-악하다’를 초월해서 선한 것을 말합니다.

다만 원컨대 재가에서 청정을 닦으면 곧 서방이니라.

포탈라궁까지 갈 필요가 없이 집안에서 청정할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청정한 것은 ‘나다-너다’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군이 묻되, 화상이시여 재가에서는 어떻게 닦아야 합니까. 원컨대 가르쳐 주소서.

대사가 말하되, 선지식들아 혜능이 도속과 더불어서 무상송을 지어 주리니 다 외워 가져라. 이것을 의지해서 수행하면 항상 혜능과 한 곳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느니라.

어떻게 닦느냐고 물으니까 무상송을 지어 줄 테니 무상송에 의지해서 공부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항상 자신(혜능)과 같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송에 가로되, 설통(說通) 및 심통(心通)이여.

여기서 심통은 종통(宗通)이라고도 합니다. 종통이라고 하든지 심통이라고 하든지 같습니다. 육조 스님이 일자무식이지만 말을 참 잘하시는데, 심통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양변을 여의고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有)에도 안 걸리고 무(無)에도 안 걸리고 그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으면 자유자재하게 되어 말을 잘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 잘하는 것을 설통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부처님 같이 말 잘하는 분이 없지요. 어떻게 비유가 그렇게 나오는지 감탄이 저절로 나오지요. 그리고 심통만 하면 설통은 저절로 이렇게 나오게 됩니다. 마음만 깨달으면 말은 저절로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말이 한정돼 있습니다. ‘있다-없다’에 한정되어서 범위가 좁습니다. 그러니까 ‘있다-없다’에 걸리지 않게 되면 도통한 사람은 설통이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다.

구름이 걷혔으니까 해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본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있다-없다’에 집착해서 해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오온이 개공’이라는 것을 알고, 내가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면 본질을 보기 때문에 ‘나다-너다’는 구름이 걷히게 됩니다. 이렇게 구름이 걷히게 되면 본래 있던 해는 저절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심통·설통을 하게 되면 허공에 해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또 ‘돈교법’입니다. 오직 몰록 깨닫는다고 가르치는 법입니다.

오직 몰록 깨닫는다는 가르침의 법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서 있다 없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을 다 파괴함이로다.

이것을 해가 뜬다고 하는 것인데 해가 뜰 때는 어찌 보면 차츰차츰 뜬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점진적으로 밝아지는데, 조금씩 밝아지는 그것은 꿈속이고 해가 나온 그 순간이 바로 우리의 본래모습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몰록이라고 합니다. 몰록은 한몫에 라는 표현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부터 있다 없다가 부서지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러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없다가 부서진 상태로 보게 되고 이웃도 그런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는 세상을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면 입도 저절로 열려서 다른 사람들에게 ‘몰록 깨닫는다는 가르침에는 돈과 점이 없다. 내가 있다 없다로 착각해서 괴롭게 살지 말라’고 하게 됩니다.

몰록 깨닫는 가르침에는 돈과 점이 없다.

사실 몰록 이라는 것도 따로 있는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몰록 가르치는 법’이라는 것은 돈점을 초월한 몰록입니다.

가르침에는 돈점이 없음이요. 미하고 깨달음에는 빠르고 더딤이 있으니, 만약 돈교법을 배우면 어리석은 사람도 가히 미하지 아니함이니라.

혹시 이 자리에도 나는 굉장히 어리석고 둔하고 영리하지 못해서 도 닦는 것도 느리고 어렵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는데, 이 대목을 유심히 보시면 됩니다. 몰록 깨닫는 법,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어리석은 사람도 가히 미하지 않다는 것은 그런 사람도 상근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상근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돈교법을 믿는 사람이 곧 상근기이고, 돈교법을 믿지 않는 사람이 바로 하근기라고 했습니다. 이 돈교법이 사실은 선(禪)입니다. 설명을 하다보면 천 가지 만가지가 되지만, 천 가지 만가지로 분산된 것을 합하면 하나로 돌아갑니다.

설한 즉 비록 만가지이나 분리된 것을 합하면 도리어 하나로 돌아가나니.

하나가 뭡니까.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입니다. 그거 하나만 돌아가면 만가지 천 가지가 다 해결됩니다. 반대로 그것이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번뇌에 쌓여 있게 되지요.

번뇌의 어두운 집 가운데에 항상 모름지기 지혜의 빛을 내라.

그럼 지혜의 빛을 항상 내는 것은 우리가 번뇌의 캄캄한 방 가운데 앉아서 지혜의 빛을 내는 것인데, 여기서 해를 내라 하는 말은 우리가 실체가 없고 공이며 연기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말하는 정견입니다. 항상 정견을 갖추고 있으면 캄캄한 번뇌의 방 가운데 있더라도 스위치를 찾아서 그 자리에서 밝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번뇌가 곧 보리가 됩니다. 깨달았을 때는 번뇌가 보리임을 아는데 깨닫지 못했을 때는 이것을 몰라요. 번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지혜로 바뀌는 것이고, 어둠이 밝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삿된 것은 번뇌를 인해서 왔고, 바른 것이 오면 번뇌가 없어진다.

우리가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면 바른 것이 오는데, 번뇌가 없어집니다.

삿됨과 바름을 함께 사용하지 않으면 청정해서 남음이 없는데 이른다.

함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둘 다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반만 청정해지고 반은 청정해지지 않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청정해서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보리가 본래 청정해서 마음을 일으키면 곧 망상이니라. 깨끗한 성품은 망념 가운데에 있다.

보리가 본래 청정한데 ‘있다-없다’마음을 일으키면 이것은 망상이 된다.

보리가 청정한 성품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망념 가운데 있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번뇌가 보리로 바뀌고 어둠이 밝음으로 바뀌듯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망상 가운데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망상 가운데 진리를 보려면 본질을 봐야 하는데요, 본질을 보려면 어떻게 봐야 하겠습니까.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보면 그것이 바로 보리로 바뀌고 청정으로 바뀌고 진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다만 바로 하면 세 가지 장애가 제해짐이로다.

바로 한다는 것도 양변을 여의는 것입니다. 이 삼장도 탐진치로 보면 됩니다.

세간에서 만약 도를 닦을진대는 일체가 다 방해롭지 아니하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방해되는 것이 참 많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도 많고, 무슨 일을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많고, 방해되는 게 참 많은데 실체가 없고 공인 줄 알게 되면 보기 싫은 것하고 방해되는 것까지 다 내 친구가 됩니다. 돈교법이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 되려면 공도 들여야 되고, 술도 한잔 먹어야 되고 하는데 이런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는데 주변에 어려운 일도 있는데, 그런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고(苦)가 아니라 쉬운 일로 느끼면서 전부다 낙(樂)으로 됩니다.

그 전에 제가 도깨비 방망이 같다는 말을 했는데 사실 도깨비 방망이와 같습니다. 공으로 보는 그 자리가 도깨비 방망이예요. 그것이 모든 어려움을 좋은 것으로 바꾸고, 모든 밉고 나쁜 사람을 좋고 예쁜 사람으로 바꿉니다. 몸짱·얼짱도 필요 없어요. 이것을 아는 사람은 모두 다 몸짱이고 얼짱입니다. 비만이라는 것도 ‘내가 있다’는 데서 생깁니다. 얼굴이 못생겨도 밉지 않은 사람이 있고, 얼굴이 잘생겼어도 거부감이 느껴지고 미운 사람이 있어요. 그건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알면 밉지 않은 사람이 됩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미인이라도 미인으로 보이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교만을 떠는 사람은 다 밉게 보이거든요. 교만은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우리가 제대로 공부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항상 자기 허물을 드러내서 있게 하라. 그러면 도(道)와 더불어서 서로 상응할 것이다. 형상에는 스스로 도가 있거늘 도를 여의고 별도로 도를 찾음이니라.

이런 사람은 허물이 없지요. 허물이 있더라도 자기 허물을 드러내서 감추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고칠 확률이 참 많습니다. 하나 하나 고쳐가다가도 실뭉치 끊어내듯 한 몫에 고치게 됩니다. 그 방법을 알고 그쪽으로 따라가지요. 여기서 말하는 도가 본질이고 형상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형상에는 본질이 꼭 있습니다. 정신에도 있고 육체에도 있고 생명 있는 것에도 있고 생명 없는 것에도 있고, 또 태·란·습·화에도 있고요. 또 상이 있는 것에도 있고 상없는 것에도 있고 다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도가 있는데 그 도를 내버리고 별도로 자꾸 다른데서 그걸 찾고 있습니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데, 시끄러운 가운데 도가 있습니다. 추운 것 싫어하는 사람 역시 따듯한 곳을 찾아다니는데, 추운 곳에 도가 있음을 알지 못하면 평생 따뜻한 곳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몸짱이니 얼짱이니 하지 말고 뚱뚱하면 뚱뚱한데서 날씬하면 날씬한데서 보라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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