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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린 두 번째 왕자…그를 기려 세운 절

기자명 법보신문

강순형 창원문화재연구소장 특별 기고
왕흥사-사리장치 깊이보기

글 순서

1. 최고·최대 사리그릇 발굴하다
2. 왕흥사, 임금이 배타고 들어가는 구조
3. 언제 창건 되었나-위덕왕 때 창건?
4. 아좌태자 외 역사에 없는 또 한 왕자
5. 사리 그릇 차림새
6. 유리병 대신 순금 사리병
7. 사리장치처의 궁금증
8. 금은보화들-진단구? 공양품?
9. 세알의 사리는 어디로 갔나?
10. 40여 종 최고의 세공품들
11. 기타 출토품들
12. 위덕왕이 세운 두 절과 사리공양


4. 아좌태자 외 또 한 왕자 등장

<사진설명>왕흥사 사리장치는 금·은·동 세겹으로 구성돼 있다.

앞서 말했듯, 가장 바깥 사리그릇인 청동원통형 사리합의 몸 거죽에 ‘···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 곧, 577해에 죽은 왕자를 위하여 사리를 넣고 탑(찰주)을 세웠다는 새로운 사실이 나타났다.

이는, 우리가 아는 위덕왕의 아들로 597년에 일본에 간, 쇼토쿠태자의 스승인 아좌태자阿佐太子 외에 또 다른 왕자가 있었음을 알 게 된 수확이다. 능사의 사리돌함을 통해서는, 누이妹도 있었음을 알게 된 것과 더불어. 그러면 누가 태자 곧, 형일까?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었을 뿐인 아좌는 실은, ‘왕자’라고만 되어있다. 죽은 이 왕자가 태자고, 그가 죽은 20해나 뒤에 일본에 건너가는 아좌가 태자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리를 봉안한 탑을 세우고 큰 절을 열만큼 비중이 큰 태자가 일찍 죽었기에 기리는 게 아닐까?

나아가 이번에, 이 명문을 가지고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는 한 술 더 떠 ‘亡’자를 ‘三’자로 읽고는 죽은(?) 세(三)왕자를 위한 불사를 했다고 주장한다. 명문의 맨 끝에 나와 있는 ‘三’자와는 전혀 다르게 써버린 글자꼴이 여기서 참으로 삼三’자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인데다, 가로획의 길이 변화도 전혀 없는 글씨체여서 쉽지가 않다.

더구나, 하나도 아니고 살아있는 셋이나 되는 왕자를 위하여 이 불사佛事를 했다는 게 더욱 그렇다. 그러했음에도, 종래에는 그의 아들들이 아니라 아우 쪽이 임금을 계속 이어가 버림을 봐서라도 그렇다.

아무래도, 이번의 명문 나옴으로써 보다 왕흥사는 위덕왕이 나라와 왕실의 무궁과 죽은 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원찰로 비롯되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래서, 위덕왕은 능사(567년)는 죽은 아버지 성왕을 위하여 누이와 매형妹兄과 더불어서, 그리고 왕흥사는 죽은 아들을 위해 절을 모으게 된 것 보는 게 알맞다.

<사진설명>원통 모양의 청동 사리외함의 표면에는 예서체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을 통해 위덕왕에게는 아좌태자 외에 또다른 왕자가 있음이 확인됐다.

5. 사리그릇 차림새

3겹으로 차려진, 밝게 빛이 나는 금·은·(청)동 사리그릇은 땅 밑 심초석(100×110㎝)의 남쪽 끝에 파여진 길게 네모난 사리홈(16×12×16㎝) 안에 포개어져 봉안되어 있었다. 사리홈 위로는 밑쪽에 턱이 붙은 화강암 뚜껑으로 꽂아 덮어 바깥의 돌함-돌외함을 만들어 눈길을 끄는 것이다. 결국은 4겹의 차림새인 셈이다. 이는 가장 시원적이고 기본적인 차림새가 된다.

사리그릇만은 원통 모양의 청동 사리외함에, 은으로 만든 호壺,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금으로 된 사리병의 기본인 3겹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뚜껑은 모두 보주형 꼭지가 붙어있다.
청동사리합(높이10.3, 폭7.9㎝)은 발굴했을 때, 보주형의 뚜껑꼭지가 부러져 사리홈의 흙탕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릇의 표면이 반들반들 윤이 난다.

뚜껑 상면에 두두룩하니 자연스런 굴림 호가 이루어져 당당하다. 몸채는 원통꼴인 특징을 하고, 위·아래로 2줄씩 선을 돌리고 그 사이에 앞서 살펴본 중요한 5자6행29자의 예서체 명문이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은사리호(높이6.8, 지름4.4㎝)의 크기로, 청동사리합에 들은 것이다. 주둥이는 목이 높은 광구廣口병꼴이며, 보주형 꼭지 둘레의 뚜껑면에는 8잎 연꽃잎무늬가 새겨 돌려져 있다. 밝게 빛을 발하고 있어 마치 갓 만든 새것 같다. 금사리병(높이4.6, 지름1.5㎝)이 가장 안쪽에 놓여 찬란한 황금빛을 뿜는다.

하지만, 3알의 사리는 1알도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금·은 사리그릇엔 맑은 물이 (들어와?) 담겨 있었다. 보주형 꼭지의 둘레 뚜껑면 또한 은사리호와 마찬가지의 연꽃잎이 6잎으로 돌려 새겼다. 이러한 보주형이나 연꽃잎무늬는, 앞선 웅진(熊津=공주)시대의 무령왕릉(武寧王, 462-523) 등에도 보이는 남조(梁)를 비롯한 북조와의 교류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사진설명>사리그릇이 발견된 곳. 사리그릇은 땅 밑 심초석의 남쪽 끝에 파여진 길고 네모진 사리홈 안에 포개져 봉안돼 있었다.

6. 유리병 대신 순금 사리병

왕흥사에 나온 백제시대 사리갖춤莊嚴이 모두를 놀라게 하고 있다. 그 호화·찬란함이나 정교한 세공기술과 다양한 재질 및 종류에서뿐만 아니라 나아가, 명문이 함께해 연대와 내용이 분명하면서 삼국시대의 최고最古이자 유일한 사리차림새와 짜임새를 이룬 탓이다.

삼국시대의 사리그릇은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다만, 신라의 분황사석탑(634)에서 자료가 일부 엿보인다할 뿐이며, 백제도 부여 군수리절터(538-660사이)의 목탑터 심초석 윗부분에서 널리 알려진 납석제여래좌상과 금동보살입상만이 나온 그 흔적과, 익산 제석사(600-639사이)의 7층목탑터 심초석 속에 사리 담은 수정水晶병을 목칠함木漆函에 넣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사리를 바로 넣는 가장 안쪽의 사리병은, (백)수정이나 (녹·청)유리제가 많이 보이는 것이다. 왕흥사같은 금사리병은 보다 앞서는 원초적·근본적 재질이다. 더구나, 왕흥사 (황)금사리병(비중18)은 순금(비중19)이라 할 황금으로 분석되어 주목받는다. 그래선지, 이제 막 만든 것같이 빛난다.

쓸개꼴의 몸집이나, 배쪽이 보다 부르면서 각角을 내며, 굵은 목에 기름병같이 입이 넓은 광구廣병꼴을 한 특징을 보인다. 높은 보주형 꼭지가 달린 뚜껑면 둘레는 은사리호와 같은 꼴의 6꽃잎 연꽃잎무늬가 새겨져 있다. 더구나, 은호銀壺의 안바닥에는 이 금사리병이 놓일 낮은 원통꼴 받침이 마련되어 있어, 신라 「황룡사찰주본기(黃龍寺刹柱本記), 872」에도 나오는 ‘금은고좌金銀高座’위에 사리병을 놓는다는 전통이 나타난 첫 예로 중요하기만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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