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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 스님]가을엔 결단하라

기자명 법보신문

가을은 수확의 계절
작은 인내심으로도
삶은 절로 풍부해져

춘생하장(春生夏長)
추수동장(秋收冬藏)
봄에는 소생하고, 여름에는 성장하고, 가을에는 거둬들이고, 겨울에는 갈무리한다.
이것이 천지가 운행하는 도의 큰 길이다.(此天道之大經也) 『史記』

우리 절은 광화문에서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초입, 경복궁의 동문과는 도로 하나를 마주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옛 왕궁의 돌담이 도로 너머로 높고 튼튼하게 세워져 있고,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 넓은 보도를 따라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이 길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때도 이 은행나무의 변화와 함께한다. 이른 봄 앙상한 가지에서 새순이 싹트는 시기, 그리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이즈음이다. 구청에서는 새벽 한때 외에는 낙엽을 일부러 쓸지 않기도 한다. 관에서 하는 일이 고맙게 느껴질 때가 바로 이런 일일 수 있으니 또 유쾌하다.

옛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에 따라 인간이 가져야하는 덕을 말하기도 한다. 사계절을 보자. 봄에는 만물이 생겨난다. 어린 싹이나 생명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일반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봄의 덕은 살생하지 않는 것이다. 여름은 소생한 초목들이 더욱 성장해간다. 어린애가 자라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식은 어린아이일 때 가르치고, 며느리는 처음 들어올 때 가르쳐야 한다”(子敎孩 婦敎初來)『顔氏家訓』는 말처럼, 교육이 여름의 덕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가을로 접어들면 날이 서늘하다가 점점 추위로 변해간다. 이 ‘서늘함’은 ‘살(殺)’과 관계가 있다. 추수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부분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무릎에서 사고 어깨에서 판다”는 증권의 격언이 있다던가. 그래서 가을의 덕은 미뤘던 일을 과감히 결단하고 정리하는 데 있다. 옛날엔 사형집행도 이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겨우내 갈무리를 잘해야 한다. 『주역』에서는 “음·양의 순환이 도”(一陰一陽之謂道)라 했다. 사람도 밤에 휴식을 잘 취해야 활력이 생긴다. 겨울은 만물이 땅속에서 갈무리되는 계절이므로 무엇보다 토목공사 같은 땅을 파헤치는 일을 금하였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계절의 덕이 이와 같다.

뜰에 낙엽을 쓸다 고개를 돌리면 다시 가을이 쌓였다. 겨우내 화분을 넣어놓을 온실을 더 키워서 짓는 한편, 거름으로 쓸 퇴비를 궁리하고 있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즉 현자의 황금은 쓰레기 더미 속에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심층의식 속의 번뇌의 찌꺼기도 잘 소진되어야 하겠지만, 버려지는 쓰레기와 부식토가 식물에게는 더 없는 자양분이 된다. 만사 약간의 인내심만 가져도 우리의 삶이 풍부해질 수 있다는 자연으로부터의 교훈이다.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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