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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왕실의 여인불자들]19 순회세자빈 윤씨

기자명 법보신문

11세에 청상과부… 평생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

행실 바르고 덕 높아 궁중 귀빈들 모두 존경
궁궐에서 불공해도 불쌍히 여겨 왕이 허락
왜란 때 시신 불타…임종도 불행했던 여인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바로 절망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절망의 해독제는 희망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 더 크고 높은 곳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 이것이 바로 인간이 종교를 믿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절대 고독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은 신앙 이외에 없음을 키에르케고르는 강조한 것이다.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실의 수많은 여인들이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 절망에 빠지기 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구중궁궐 속에 갇혀 수없는 밤을 고독 속에서 지새워야 했던 그들이, 왜 하필이면 국가에서 그토록 금지했던 불교에 의지했던 것일까. 그들의 삶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유교라는 종교가 있지 않았느냐며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견해는 병 속에 갇힌 새에게 병 속을 병 바깥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왕실 여인들 중에서 그 누군들 절망에 사무치는 시절을 겪지 않았겠느냐마는 그 중에서도 순회세자비 공회빈 윤씨(1553∼1592)은 애처롭기 그지없는 일생을 살다 간 여인이었다.

그녀의 남편 순회세자는 명종의 맏아들이다. 1562년 공회빈 윤씨와 혼인할 당시 순회세자는 열두 살, 윤씨는 열 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듬해 순회세자는 열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공회빈은 사춘기도 채 겪지 못한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것이다.

나이가 어려 합방조차 못한 상태였을 테지만, 이미 한번 궁중에 들어온 여인이 궁 밖으로 나가 재가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시대였다. 그녀는 사가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경복궁에 남았다. 사랑, 질투, 음모, 협박, 이런 것들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지 겪어보지도 못한 채 궁궐 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으로 버려진 것이다.

그녀를 애처롭게 여긴 시어머니 인순왕후는 숨을 거두면서도 며느리를 궁중에서 내보내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내렸다. 궁궐 밖으로 나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할 어린 며느리가 애처로웠던 시어머니는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걱정하고 안쓰러워했던 것이다. 이에 선조는 아직 세자를 책봉하지 못해 동궁이 비어있으니 계속 동궁에 머무르라며 그녀를 배려했다.

남편도 시부모도 없이 궁중에서 살아가던 그녀였지만 행실이 바르고 덕이 많아 궁중의 비빈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선조실록』에서는 그녀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임금(선조)이 정성을 다하여 그를 대우하였고 여러 비빈들도 모두 그로부터 글을 배웠다. 빈은 성품이 지극히 곧고 정결하였는데 세자의 상을 마친 뒤에도 일생 동안 언제나 상을 당했을 때처럼 지냈으며 친척들도 절대로 대궐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이 짧은 기록을 통해 우리는 순회세자빈이 평생을 겸손하고 신중하게 살아갔음을 알 수 있다. 여러 비빈들이 그녀에게 글을 배웠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학문이 높았으며 무엇보다 그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었음을 말한다. 또한 친정 식구들을 대궐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지 않도록 행동을 항상 조심했음을 알게 한다.

실록에는 그녀와 관련해 또 다른 중요한 기록이 등장한다.

조상들의 영혼을 빌어주기 위하여 불공드리는 일을 적잖게 하였지만 임금은 불쌍하게 여겨 금지하지 않았다.

이는 그녀가 불심이 돈독한 불자였으며, 또한 행동을 항상 삼가던 그녀가 불공드리는 일에는 무척이나 적극적이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녀가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고자 스스로 의지처로 삼았던 대상이 바로 불교였음을 알려준다.

공회빈처럼 과부가 된 여인들이나 아예 성은을 입지 못한 채 평생 처녀로 늙어가는 여인들이 왕실에는 수도 없이 많았다. 이들에게 불교신앙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한 종교가 아니라 자연스런 삶의 일부에 다름 아니었다. 이 외롭고 절망스러운 여인들에게 불교는 이미 종교를 넘어서 그들의 삶을 지켜주는 커다란 방패막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불교가 왕실의 보호 속에 살아남았듯이 조선왕실 또한 불교의 품속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회빈의 삶은 생전에도 그러했듯이 죽음을 맞고 난 이후에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 불쌍한 여인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편안한 휴식을 얻지 못했다.

그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 3월 3일 마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실에서는 순회세자 곁에 그녀를 묻어주기 위해 큰 공사를 벌였다. 그런데 그해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20일 만에 왜군들이 도성까지 쳐들어왔고, 선조는 부랴부랴 신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공회빈의 시신은 땅에 묻히지도 못한 채 경복궁의 한 건물에 버려지게 되었다. 궁궐의 나인들과 내시들도 피난 준비에 정신이 없는 터라 결국 그녀의 시신을 내팽개친 것이다.

『선조개수실록』에는 “시빈관 몇 사람이 후원에 임시로 가장(假葬)을 하려 하였으나 관이 너무 무거워서 옮길 수가 없었다. 조금 뒤에 궁전에 불이 붙자 관리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관이 무거워 옮길 수 없었는지, 제 살길 찾기가 급했던 관리들의 팔 힘이 갑자기 빠져버린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어쨌든 관리들이 그녀의 관을 그대로 버려둔 채 부랴부랴 도성을 빠져나간 것만은 확실하다.

선조가 한양을 떠난 직후 민중들은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 경복궁 전체가 불길에 휩쓸리면서 그녀의 시신이 안치된 건물 또한 불에 타는 변을 당하게 되었다. 이를 목격한 이들이 비통해 하면서 말하기를, “빈이 살아있을 때에 불교를 숭상하더니 죽어서 이렇게 화장을 당하였으니 이 또한 그의 뜻에 합당한 것이다”라며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한성이 탈환된 뒤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그때서야 그녀의 시신을 찾았으나 이미 불에 타버린 지 수년이 지난 시신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시신이 없는 채로 순회세자 곁에 봉분을 만들고 신주를 모셨다. 그런데 이 신주마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의 침입으로 사라져 버렸다. 결국 공회빈은 시신도, 신주도 잃어버린 채 덩그러니 봉분만 남아있는 빈 무덤의 주인이 되고 말았다.

공회빈의 경우에서 보듯, 살아서도 기구한 운명을 살다간 이의 길은 죽어서도 그리 달라질 게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 고독 속에서 살았을지언정 절망에 빠진 채 허우적대던 여인은 결코 아니었다. 왕실 내에서 그녀가 비빈들과 왕의 존경을 받으면서 살아갔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부처든, 공자든, 하느님이 되었든 신앙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삶의 의미로 스스로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절망의 반대말이 믿음인 이유이다.

공회빈은 비록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을지언정 당당하게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한 여인이었다.

고독과 절망. 이 둘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벼랑 끝에 서있는 형국이라는 측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지만 당사자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낭떠러지로 내몰리는 존재가 되기도, 더 넓은 땅으로 도약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그 지향의 땅을 ‘정토’ 또는 ‘청량지’라고 표현한다.

그 세계에 대한 확신은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비출 수 있는 ‘통찰의 지혜’. 바로 여기에 종교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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