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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57

기자명 법보신문

제 11장 태백산 도솔암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몇 번이나 청산에 꽃이 피었다 졌다 하는 것을 보았느냐
봄이 아니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고개를 한번 돌아보니 천지가 눈꽃으로 희어버렸더라.”

1957년.

석남사 주지를 맡게 된 인홍은 홍제사를 떠났다. 홍제사 비구니 대중도 뿔뿔이 흩어졌다. 대중 중에 현각과 불필 등은 인홍을 따라 석남사로 갔고, 나머지 비구니는 각자 인연 따라 다른 절을 찾아 갔다.

홍제사는 잠시 비었지만 곧 태백산 기운과 산세를 좋아하는 비구들이 대여섯 명 들어와서 대중을 이루었다. 법전이 ‘따로 살지 말고 모여 살자’고 제의하여 서암, 지유, 석주 등이 흩어져 수행하다가 홍제사로 들어왔던 것이다.

일타는 도솔암에 그대로 있으려고 했지만 법전이 도솔암까지 올라와 홍제사로 내려오기를 간청하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법전은 일타보다 세속의 나이로는 서너 살 위였지만 출가한 연도가 같은, 즉 승랍(僧臘)이 같았으므로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도반이었던 것이다.

“일타스님, 우리 홍제사에서 신심 나게 정진 한 번 해보십시다.”
“도솔암을 비우란 말입니까.”
“우리가 어느 시절에 함께 만나 대중생활을 수 있겠소. 그러니 이번 기회에 맑은 스님들과 정진해보자는 것이지요.”

일타는 끝내 법전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성철을 만나러 통영의 천제굴에 갔다가 도반이 된 법전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저는 한두 철만 나고 도솔암으로 다시 올라오겠습니다.”

일타는 도솔암이나 홍제사나 태백산 홍점골 안에 있는 절이므로 동구불출의 원칙에 위배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인홍이 머물 때도 양식을 조달하러 홍제사까지 자주 오르내렸던 것이다. 더구나 홍제사에 모인 비구 대중들 모두 언젠가 한국불교를 이끌어갈 대들보 같은 소중한 선지식들이라고 생각했다.

“홍제사에 오신 스님들과 함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법전스님, 감사합니다.”
“일타스님, 참으로 잘 결정하셨습니다.”

도솔암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직도 인홍이 있는 줄 알고 홍제사를 찾아온 비구니들이 도솔암으로 올라가면 되기 때문이었다.

“마침 비구니 두 사람이 도솔암을 지킨다고 하니 잘 됐지 뭡니까.”

다음날 일타는 걸망에 승복과 발우만 넣고 홍제사로 내려갔다. 서암이 망태에 무언가를 뜯어 담고 있다가 일타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일타수좌, 어서 와요.”
“스님, 오랜 만에 뵙습니다. 약초를 뜯고 계십니까.”
“약초가 아니에요. 산토끼가 먹는 풀인데 사람에게는 나물이 돼요. 스님들에게 맛있는 반찬 해주려고 뜯고 있어요.”

그러면서 서암이 밭둑에 난 풀을 한두 잎 뜯더니 씹어 먹었다.

“스님, 독풀도 있잖습니까.”
“독풀도 작게 먹으면 오히려 약이 돼요. 산짐승들은 우리 인간처럼 절대로 욕심을 부려 많이 먹지 않습니다. 약이 될 만큼만 조금 먹으니 독풀들하고 공생 공존하는 것이지요.”

일타가 우두커니 서 있자, 서암이 자신보다 12살 아래인 일타에게 우스갯소리를 했다. 서암은 다른 스님들에게도 농담을 잘했다.

“일타수좌, 혼 빠진 할미가 딸네집 건네 보듯 하고 있지 말고 어서 절로 갑시다. 하하하.”
“네, 서암스님.”
“스님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요. 절은 절하는 곳이 아닙니까. 하하하.”

그날 밤 큰방에 모여 소임을 짰다. 가장 연장자인 서암에게는 소임을 맡기지 않았다. 선방으로 치자면 특별한 소임 없이 대중과 함께 정진하는 한주(閑主)인 셈이었다. 누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각자 자신이 정했다. 법전이 먼저 자신이 맡고자 하는 소임을 말했다.

“저는 부목을 맡겠습니다. 산비탈에 넘어진 썩은 나무둥치를 줍고 톱질해서 울타리 밑에 장작 쌓는 실력이야 저를 따를 분이 있겠습니까.”

지유도 나서 말했다.

“저는 공양주 소임을 맡겠습니다. 양식을 잘 마련하여 여러분께 부처님 마지 올리듯 따뜻한 밥을 해 올리겠습니다.”

석주도 조용히 말했다.

“제가 할 일은 채공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태백산 약초와 나물을 캐다가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법전이 일타를 지목하여 말했다.

“일타스님은 이야기를 잘하니 신도를 맞이하는 지객을 맡으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스님이 말했다.

“일타스님은 염불이 최고라고 금오스님께서 칭찬하시더이다. 그러니 부전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타가 진주 응석사에서 부전 소임을 볼 때 염불기도를 7일 동안 밤낮으로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응석사 조실인 금오가 일타를 불러 크게 칭찬했던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지객과 부전을 동시에 맡아달라고 하자 일타는 부담스럽기도 하여 대답을 못했다.

“일타스님, 두 가지 소임을 맡게 된 거 축하드립니다. 그만큼 능력이 있으니 맡기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일타는 지객과 부전 소임을 함께 맡기로 하고 안거에 들어갔다.

안거는 선방 청규에 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웠다. 좁은 선방에는 돌아가면서 한 사람만 들어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각자 소임대로 나무를 하거나 반찬거리를 구하거나 멀리서 온 신도를 맞이하여 설법을 했다.

대중은 서로 이야기하면서 신심을 돋우기도 했다. 서암이 한 얘기도 대중에게 울림이 컸다. 서암이 탁발을 다니면서 경험한 얘기였다.

서암이 탁발하려고 한 곳은 마을의 부잣집이 아니었다. 마을 입구의 후미진 산모퉁이에 움막을 만들어 사는 거지촌으로 가 목탁을 치며 염불을 했다. 목탁 소리가 시끄러웠던지, 한 사내거지가 움막의 거적때기를 들추고 나와 서암을 쳐다보았다. 서암은 염불을 끝내고 나서 한 마디 했다.

“적선(積善)하시오.”

적선이란 선을 쌓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거지는 보시하라는 말로 알아듣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얻어먹는 거지가 스님께 줄 것이 어디 있겠소. 동냥해온 식은 밥이 조금 있을 뿐이니 저 마을의 부잣집으로 가보시오.”
“먹다 남은 밥이라도 좋으니 적선하시오.”

순간, 거지가 ‘내가 스님에게 밥을 줄 때도 있네’ 하고 중얼거리면서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피식 웃으며 나왔다. 그때 서암은 거지의 얼굴을 보고 ‘탁발 한번 잘했다’는 만족감이 들었다. 식은 밥 한 덩이보다 거지의 행복해하는 표정을 탁발한 것 같았던 것이다.

서암의 얘기를 듣고 있던 일타가 말했다.

“가섭존자도 부처님 살아계실 때 스님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 거지처럼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일타수좌, 가섭존자도 탁발하면서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단 말인가요. 아무튼 일타수좌는 박식하다니까.”
“경전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일타수좌,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일타는 그 자리에서 얘기를 꺼냈다. 이럴 때 창고 한쪽은 지대방이 되었다. 석주가 아궁이에서 구어 온 군고구마로 허기를 달래면서 대중들은 언제나 일타의 구수한 얘기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가섭과 아난은 탁발하러 정사(精舍)를 나섰다. 그런데 가섭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변두리로 가려 하였고, 아난은 부자들이 사는 저잣거리로 가려 하였다. 두 사람은 탁발을 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서로의 마음속에 각각 의문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섭의 의문은 아난이 왜 ‘부잣집만 골라 탁발하는가’였고, 아난의 의문은 가섭이 왜 ‘가난한 집만을 골라 탁발하는가’였다. 마침내 아난이 정색하며 가섭에 물었다.

“가섭존자여, 왜 가난한 집만 골라 탁발하는 것입니까.”
“아난존자여,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과거에 남을 위하여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내생에는 행복해지라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가섭이 아난에게 물었다.

“아난존자여, 왜 부잣집만 찾아가 탁발하는 것이오. 가난한 이를 멀리하고 부자만 가까이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지 않겠소.”
“가섭존자여,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탐욕의 늪에 빠지기가 더 쉽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가진 것을 베푸는 보시의 기쁨을 알도록 부자들만 찾아 탁발하고 있는 것이오.”

두 사람은 논쟁을 중지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탁발한 다음 정사로 돌아갔다. 그런데 두 사람의 얘기를 들은 부처님은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차별 없는 마음을 강조할 뿐이었다.

“부처의 마음이란 큰 자비심이니라. 차별을 두지 않는 자비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니라.”

가섭과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날 탁발을 나갈 때는 서로 가던 곳을 바꾸어 갔다.

서암(西庵).

1914년에 경북 풍기읍 금계동에서 태어난 스님은 아버지 송동식이 독립 운동가였으므로 가족이 화전민으로 숨어 살며 거처를 옮겨 다녔는데, 스님은 그런 역경 속에서도 틈틈이 공부하여 11세에 예천의 사설학원인 대창학원에 입학하여 소사를 하며 어렵게 졸업하였다. 강의록으로 독학하여 다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1928년에 서악사로 출가하는데, 이후 김룡사로 가 몇 개월 동안 행자생활을 한 뒤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김룡사 강원을 졸업하여 비구계를 받았는데, 탐구심이 많은 스님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폐결핵 환자가 되어 3년 만에 중퇴하고 귀국하고 만다. 국내로 돌아와서는 김룡사에서 요양한 뒤 금강산 묘향산 등으로 행각에 나섰다가 1943년 31세 때에는 문경 대승사로 돌아와 성철, 청담, 우봉, 윤포산 등과 함께 정진하였다. 이때 폐결핵이 완치되었고 1945년 조국이 해방되던 해에는 예천에서 포교당을 1년 간 운영하며 청년불교 활동을 하였고, 다음해에는 대분심을 내어 계룡산 갑사 바위굴로 들어가 한 달간 단식정진에 들어갔다.

그때 스님은 처음으로 견성(見性)을 하였다. 바위굴에서 좌선하던 어느 날이었다. 밤낮으로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더니 생사의 경계마저 한갓 그림자처럼 휙 지나가는 것이 눈앞에 보였다. 스님은 참된 선리(禪理)를 맛보고 대발심하여 즉시 해인사 선방으로 갔다가 1949년에는 지리산 칠불암으로 들어가 금오, 도림 등 7, 8명의 수좌들과 ‘공부하다 죽어도 좋다’고 서약하고 목숨을 내어놓는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이후 문경 원적사와 봉암사를 오가며 수좌들과 정진하던 중 전쟁이 나 헤어졌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불교정화운동 5인대표로 활동하였고, 다시 참선하는 수좌로 돌아와 도봉사 천축사에서 1년간 무문관에 들었다가 김룡사 금선대로 가 정진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김룡사 금선대는 스님이 홍제사로 오기 전까지의 1인 선방이었던 것이다.

말수가 적은 법전은 대중에게 구수한 얘기를 하기보다는 시를 지어 대중에게 돌렸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찾아와 태백산에 산지사방으로 눈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 문득 시흥이 일어 지은 시였다.

내가 묵묵하고 말없는 너에게 묻고자 한다
몇 번이나 청산에 꽃이 피었다 졌다 하는 것을 보았느냐
봄이 아니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고개를 한번 돌아보니 천지가 눈꽃으로 희어버렸더라.

동안거를 끝낸 홍제사 대중들은 또 다시 구름처럼 바람처럼 각자 만행을 떠났다. 법전은 홍제사보다 더 깊은 사자암으로, 석주와 지유는 다른 절로, 일타는 도솔암으로 갔다. 또한 불교정화운동의 5인대표로 활동한바 있는 서암은 동산과 청담 등의 권유로 경북 종무원장을 맡아 홍제사를 떠났다.

도솔암에 오른 일타는 다시 작년의 방식대로 정진했다. 도인으로 소문이 나자 안동뿐만 아니라 부산의 신도들이 도솔암에 올랐다가 가곤 했다. 일타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았다. 스님이나 신도가 밤중에 올라오면 손전등을 켜고 마중을 나가기도 하고, 악몽과 액운에 시달리는 신도가 천도재를 원하면 재를 지내주기도 했다.

일타는 다시 삭발하고 수염을 깎았다. 신도들이 자꾸 도솔암으로 찾아오니 승려로서 위의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산과 습득처럼 산중에서 홀로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찾아오는 스님과 신도들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도솔암에 오른 지 6년.

일타는 도솔암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이제 도솔암을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일타는 동구불출에서 벗어나 걸림 없는 운수승처럼 만행을 하고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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