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일에 맞춰 봉안한 사리장치
열반일에 맞춰 봉안한 사리장치
  • 법보신문
  • 승인 2007.11.2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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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형 창원문화재연구소장 특별 기고
왕흥사-사리장치 깊이보기


글 순서


1. 최고·최대 사리그릇 발굴하다
2. 왕흥사, 임금이 배타고 들어가는 구조
3. 언제 창건 되었나-위덕왕 때 창건?
4. 아좌태자 외 역사에 없는 또 한 왕자
5. 사리 그릇 차림새
6. 유리병 대신 순금 사리병
7. 사리장치처의 궁금증
8. 금은보화-진단구? 공양품?
9. 세알의 사리는 어디로 갔나?
10. 40여 종 최고의 세공품들
11. 기타 출토품들
12. 위덕왕이 세운 두 절과 사리공양


 7. 사리장치처의 궁금증

나라절國刹 왕흥사에 모신 사리차림은 나무탑의 땅밑에서 나왔다. 이는 나중의 탑받침基壇이나 탑몸塔身보다 앞서는 근본방법이다. 곧,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초기의 사리봉안법이자 장소인 것이다. 무덤같이 본 탓-까닭이다. 인도는 땅밑에 사리함函이나 방房-사리실室을 마련하고, 중국도 남북조(420·386-589·581)·육조(222·229-589)에서 수대(581-618) 초기에 땅밑 1장-4척(3-1.2m) 깊이에다 사리함을 묻고 있다(打刹…舍利設齋…同下入石函). 물론 목탑에서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삼국유사 등에 立刹柱·安於柱中), 여기에 더하여 땅밑 네모난 심초석心礎石에다 사리홈孔을 파고 사리를 모시고 있다. 바로, 탑 밑의 땅속에서 나왔다고 해도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땅밑에 사리함이 묻히더라도 또, 땅밑의 심초석 곧, 중심기둥心柱=刹=刹柱이 놓이는 자리인 중심 주춧돌心礎石의 위에 놓이는 법과 심초석에 사리홈을 파고 그 안에 사리를 차리는 법의 둘이 보인다. 첫째 것은, 사리 공양품이 나온 부여의 군수리절터(6세기)·금강사터(6세기) 나무탑자리 자료를 들 수가 있다.

그러나, 둘째 것으로 자리를 차지한다. 나중에는, 나무탑이면서 땅바닥地面으로 올라온 심초석에도 사리홈을 판 사리봉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익산 제석사(639불탐), 신라로 가서는 황룡사(645), 사천왕사(679)를 비롯해서 나타난다. 더불어, 일본의 비조사(飛鳥寺, 593쯤)들로 나아간, 가장 오랜 첫 보기가 이번 왕흥사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서도, 초기-원시적의 모습인, 심초석의 한 가운데가 아니라 한쪽(남쪽)으로 치우쳐, 그것도 작게(16×12×16㎝) 홈을 마련한 모습이다.

곧, 왕흥사 목탑 사리차림은 첫째, 땅밑 쪽에다 차림 둘째, 그 땅밑에 있는 심초석에다 판 홈 안에 차림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장 오랜(577, 위덕왕24) 첫 예이자 귀중한 자료로 뜻깊은 것이다.

한편, 발굴조사단은 이 심초석(100×110×45㎝)이 중심 기둥 곧, 찰주인 심주心柱가 바로 놓이는 초석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현 땅밑 50㎝ 아래에 놓인 네모난 이 돌받침이 심초석이 아니라, 이 위로 다시 흙을 (판축版築으로) 쌓아 그 위에 다시 찰주를 놓는 주춧돌인 심초석을 다시 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초석 크기로 되메움 흔적의 쌓아올린 흙층이 처음 그때의 것으로 과연 볼 수 있을까하는게, 함께한 몇 지도위원 의견도 있어 보다 깊은 조사·판단이 필요하다 하겠다.
더우기, 10해 앞서 같은 위덕왕(사리공양은 妹兄公主 곧, 누이 또는 매형과 누이)이 세운(567, 위덕왕14) 2㎞만 떨어진(남동쪽) 같은 부여 능사陵寺에서는 나무탑자리 땅밑 114㎝의, 네모난 받침돌에 기둥-심주 토막(느티나무槐木기둥, 지름 50㎝)이 그대로 놓여 있어서, 이 받침돌이 바로 심초석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능사는 심초석에 홈을 파지 않고 따로 사리함(龕型, 비석-머리를 둥글게 한 갈형碣型)을 기둥 (남쪽) 곁에 놓았을 뿐이다. 때문에, 왕흥사가 비록 홈을 파서 그 속에다 사리장치를 한 것이지만 보다시피, 굳이 홈을 한 가운데 파지 않은데다, 유달리 작은(16×12×16㎝) 홈으로, 그것도 가로(남쪽 끝) 치우쳐서 두었음도 기둥 놓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배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땅 속에 사리차림을 하고 그 위로 기둥-심주心柱=찰주刹柱를 세우는 굴립주掘立柱를 하고 탑을 완성해 감은, 왕흥사 사리그릇에 새겨진 글(立刹 本舍利…葬)도 그대로 밝히고 있다. 물론 목탑 경우로, 이를 이른바 굴립식掘立式이라하는 것이다.
여기서, 찰은 찰주(刹+柱=刹柱)이고(刹=柱也, 許愼, 『說文解字』, 後漢, 100), 이는 곧 심주心柱가 된다.

그리고, 사리를 묻는다는 「葬」자-새겨진 글銘文의 24째 글자가 葬자가 아니라, 묻을 「예」라 보고 있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는 발표한대로 葬자가 맞다. 선명히 보인다고 할 수 있는 글자이므로 그러기엔 우선, 글꼴에도 문제가 보이지만, 가 되려면 그 획수가 너무 적다.

葬자는 밑의 卄받침 대신에 大, 土도 같이 쓰는 것으로 더우기, 예서隸書체에서 이미 土받침으로 나타내고 있는 글자이다. 더불어, 왕흥사 사리그릇에 새겨진 글씨體는 남북조(420·386-589·581)풍의 해서楷書체이나, 「子」자에서도 보듯 예서기가 남아있는 서예자료로서 소중한 것이다. 더구나, 는 옛 사리장치 용어로서는 보이지 않고, 오늘날 중국학자들이 사리장치 글에 주로 쓰고있는 용어다.물론, 홀로가 아닌 藏이나 埋로 나타내고 있다.

이에 견주어, 葬자는 고대부터 쓰는 글자. 뱀다리蛇足격으로, 자는 글자 그대로 풀어본다면, 병으로 죽는 사람을 (양쪽에서) 들어다 묻는 모습이고, 葬자에서 보이는-죽을「死」자는 +匕로 된 글자 곧, 이제 뼈(는 뼈 알字 임)만 남은(匕=化의 古字) 것을 거두어 묻는다는 뜻이니 되려, 부처의 유골遺骨=뼈인 사리를 가리키는데는 제 것.

한편, 위덕임금이 심주를 세우며立刹 땅 속에 사리를 묻은 날짜인 2월 15일도 이, 저 말이 있으나, 이는 「4대절四大節」이라하여, 탄생절誕生節인 (석가)부처(BCE.623-544)가 태어난 때=4월8일·출가절出家節=출가 한 때=2월 8일·성도절成道節인 깨달은 때=12월 8일 그리고 2월 15일은, 부처가 돌아간 열반절涅槃節인 2월 15일을 말한다. 좀 믿음있는 불자라면 다 아는 것이다.

바로, 위덕임금은 2월 15일인 부처 열반일에 맞추어 또한, 죽은 왕자(같은 태자 출신!?)을 기리며 사리를 모신 탑을 세우고 절을 짓는 불사佛事를 이루어, 나라(백성)와 왕실을 위한 미래지향의 원찰願刹로 극대화를 노린 택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그 뜻이 깊고 더하는 것이다.

능사와 더불어, 같은 곳(부여)에 위덕왕이 세운 원찰은 10해 사이에 같고 또 다른, 첫 특징들을 지니고있어 소중한 자료다.

거기다가, 파서 마련한 사리홈은 돌뚜껑(25×19×8㎝)도 있어 사리(외)함을 갖추게되어, 금사리병에 은합〈동합의 인도-중국 초기 차림새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더우기, 모를 죽인 이 사다리꼴 뚜껑은 초기 무덤古墳의 관(石棺) 뚜껑같은 녹정꼴頂型이어, 통일신라로 이어가는 사리그릇 틀型式의 본이 되는 또 첫 자료이기도 하다.

8. 금은보화-진단구? 공양품?

왕흥사에서는 심초석 사리홈의 3겹 사리그릇 말고도, 무려 8,000점이나 헤아리는 수많은 다른 유물들이 그대로 나왔다. 숫자도 가장 많지만, 금·은·동·철과 옥석과 유리 나아가 천같은 감材質과 가지種類 또한 가장 다종다양하여 놀라게 만든다. 유리구슬들은 더욱, 5색을 넘어 갖가지 간색間色까지에 2㎜안팎에서 2㎝에 이르는 여럿 크기·모습과 그 만든 솜씨가 눈 놀라게 한다.

모두, 앞서의 웅진-공주 무령왕·비릉(525·529) 것과 겨루는 것이다.

모두 귀고리·목걸이나 가락지와 팔찌들의 몸치레裝身具에서 족집게와 칼, 젓가락 나아가 엽전과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치레들로 화려찬란하다. 또한, 같은 능사의 같은 팔찌·구슬 것과도 비교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4보, 7보 및 보화들이 진단구鎭壇具로 발표되었다. 그것은, 심초석의 사리홈에서 사리그릇과 나온 것이 아니라 따로, 사리홈이 있는 심초석 앞쪽의 흙 속에 뿌려져 나왔기 때문이다.

진단구 또는 지진구란 말은 일본학자들이 써온 것이다. 곧, 건물을 세울 때 터파기한 땅 속에 건물을 위해 땅신土神 등에게 빌어 받치는-땅을 누르는 넣은 용품이라하여 지진구地鎭具(하지만, 일본은 구체적 자료도 없다. 들고 있는 593해쯤인 비조사탑 것도 우리보다 늦은 것에다, 모두 심초석의 사리홈에서 나왔다), 땅위에 단 곧 기단基壇을 만들어 탑을 비롯한 건물을 세울 때 그 기단 속에 넣는 것은 진단구鎭壇具(이도, 일본서는 8세기부터 나타나는 것)라하고, 이 둘을 하나로 일러 진단구(이하 같은 뜻)라 하고 있는 것.

때문에, 사리장엄구와는 전혀 다른 쓰임새用途인 걸 알 수 있다. 뿐 아니라, 진단구는 탑이나 건물 밑의 흙 속이나 심초석 밑에 놓고있어 사리차림새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왕흥사 쪽을 사리홈이나 사리그릇 속에서가 아닌, 흙 속에서 나왔다고 진단구로 보나 보다시피, 사리차림과 함께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없다. 같은-곳(방향)·자리·용품의 능사도 마찬가지다.

사리를 모시는 탑을 세우는 불사인 입찰立刹=타찰打刹 곧, 심주心柱를 세우며 많은 사부대중이 몰려와 함께 기뻐하고, 기리며 사리봉안(삼국유사 등에, 安於柱中·立刹柱 또,는 打刹…舍利設齋…同下 入石函)하면서, 그에 따른 너도나도 공덕(푼야)과 발원을 위하여 많은 공양供養을 한다. 그런 속에 믿음 더욱 일어나 걸고, 끼고 있던 옥목걸이나 금은-가락지·귀고리까지 앞다투어 내어놓는다. 이를 자비희사慈悲喜捨라 한다.

 옛자료에 많이 보여지는 것이다(『梁書』·『南史』등에, 刹下 及王侯妃主百姓富至所…捨 金銀環釧等 諸雜珍寶充積, 남인도 실론의 大·小史經에도 佛陀遺骨納於…以種種 寶玉供養·供養 瓔珞王冠環釧 及其他 極多 裝身供養)

왕흥사도 바로, 이런 자비희사가 나타난 좋은 예이다. 또, 나온 다종다양한 만큼-왕실에서 세우는 절답게 많은 왕족의 남녀권속을 비롯한 귀족 중심 귀중한 보화들이 공양(푸자, 지나나)된 것이다.

사리(그릇) 봉안과 함께 넣어지므로 부장하는 부장품副葬品이라 부른다면, 탑이 곧, 무덤의 뜻이고 사리 또한 주검의 뼈-유골이므로 함께 넣어진 무덤·주검의 부장품이라는 장례용품의 말을 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탑은 단순한 (일반의) 무덤이나 주검遺骨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므로(이미, 그래서 유골=신골을 굳이 사리해야 한다는, 경계하는 글들이 있다), 굳이 그런 용어를 쓸 것은 없다.

더구나, 지기地氣나 단壇을 누르는 것이 아닌 사리차림과 함께 한다면, 사리봉안 불사에 따라 동참하여 너도나도 베푼 것이므로 마땅히, 진단구가 아닌 공양구·공양품으로 봐야 하고 나아가, 사리를 꾸미고 기리는-장엄莊嚴하는 장엄구·장엄품으로 말 곁들임은 좋겠다. 따라서, 부여의 군수리절터·금강사터 목탑자리 땅밑 심초석 위의 용품들도 같은 것.
다만, 왕흥사의 밖에 이루어진, 따로 그릇을 마련하여 이러한 공양품을 모아 두지 않은데서 오는 오해라면 이는 오히려, 작은 사리홈과 사리그릇을 벗어나게 된 그때의 여러모로가 살펴져야 할 일인 것이다.

앞으로도 신라 황룡사에서 일본 비조사飛鳥寺를 비롯한 사리차림새에 따른 이러한 유물들을 진단구로 쉽게 여겨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일이다.

왕흥사 공양품들은 사리를 모시며 기뻐하고, 꾸미며, 기리면서 함께 공덕을 쌓으려 기꺼이 예배·공양·보시한 사례와 차림새·갖춤새의 첫자료가 되는 실증물로서 중요하기만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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