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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인연 58

기자명 법보신문

제 12장 보살의 길

“시비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수록 수행자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맑아지면 도량이 맑아져 삼세제불의
‘가피가 깃들고 신장들의 외호가 들어설 것이다.”

고명인은 오고 감이 자유로운 스님들의 문화를 절에 드나들면서 뒤늦게 이해했다. 스님들은 세속적인 약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도 닦는 인연 따라 오고 갈 뿐이었다. 고명인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혜각을 만나러 해인사로 갔지만 스님은 벌써 포교국장 소임을 그만두고 다른 절로 가고 없었다. 종무소의 한 스님 말에 의하면 야밤에 도망치듯 지리산 화엄사 선방으로 간 모양이었다.

고명인은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결국은 지리산 화엄사로 갔다. 자신의 사정으로 급히 미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혜각과 함께 일타의 유적지를 돌다가 중도에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혜각은 해마다 일타의 입적 주기 전에 일타가 수행했던 곳을 행각할 터였다.
고명인은 화엄사 일주문 앞에서 중얼거렸다.

“그때 혜각스님이 그러지 않았던가. 일타 큰스님이 더욱 그리워지는 입적 주기가 가까워질 때마다 큰스님께서 수행하셨던 곳을 순례하는 것도 자신의 수행이라고. 그렇다. 나도 어쩌면 혜각스님처럼 일타스님께서 수행했던 곳을 순례하는 동안 내가 누구인지, 인생이 무엇인지를 구름 걷히듯 깨닫게 될지 모른다.”

고명인은 일주문을 지나 출타하는 한 스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스님, 혜각스님이 화엄사에 계십니까.”
“아, 해인사에서 오신 그 스님 말씀이군요. 지금 종무소에 계실 겁니다. 방금 저와 차를 한 잔 했습니다.”

고명인은 서둘러 걸었다. 선방은 면회가 되지 않는 곳이니 지금 만나지 못하면 화엄사를 온 것도 허사가 될지 모를 일이었다. 평일인데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금강문 쪽으로 우르르 내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찾은 불교신자들인 듯했다. 고명인은 옆으로 비켜서 그들이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바로 옆에 세워진 시비(詩碑)에 새겨진 시를 마음의 눈으로 읽었다.

적멸당 앞에는 빼어난 경치가 많고
길상봉 높은 봉우리 티끌도 끊겼네
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 생각하니
날 저물고 가을바람 효대에 몰아치네.
寂滅堂前多勝景
吉祥峰上絶纖矣
彷徨盡日思前事
薄暮悲風起孝臺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시였다. 대각국사가 화엄사 경내의 효대(孝臺)에 들러 느낀 감상을 읊조린 절창이었다. 고명인은 문득 효대란 장소가 궁금해졌다. 효를 바치는 곳이라는 의미의 효대란 단어가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이상도 하구나. 문득 어머니가 생각나다니. 아니, 이상할 것이 없지. 어머니가 생전에 들렀던 해인사를 찾아가 일타 큰스님의 상좌인 혜각스님을 만나 일타 큰스님의 유적지를 순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명인은 곧장 종무소로 갔다. 일주문에서 만난 스님의 말대로 혜각은 종무소에서 아직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혜각은 고명인을 보자마자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고 선생, 오랜만입니다.”
“스님께서 화엄사로 가셨다기에 이리 왔습니다.”
“미국에서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스님께서 또 일타 큰스님의 유적지를 순례하시겠구나 싶어 때를 맞추어 귀국했습니다.”
“그랬었군요. 하지만 올해는 순례를 내년으로 미뤘습니다.”
“무슨 사정이 생겼습니까.”

고명인은 실망하여 맥이 풀렸다. 혜각을 만나 올해는 반드시 일타가 견성했다는 태백산 도솔암을 오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혜각은 전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올해는 화엄사 일주문을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선방에서만 보내려고 합니다.”
“안거 때가 아닌데도 선방에서 정진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화엄사 선방에는 지난 하안거 때부터 지금까지 서너 분이 남아 정진하고 계십니다. 동구불출인 셈이지요.”

혜각은 갑자기 지리산을 자랑했다.
“금강산이 법기보살의 주처(住處)라면 화엄사를 품고 있는 지리산은 문수보살의 주처입니다. 그러니 지리산은 문수대성(文殊大聖)이 머무는 산으로 무명의 중생을 깨우쳐 주는 신령스러운 산인 것입니다.”

그래도 고명인이 낙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자,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실망하실 것이 없습니다. 지금 저의 사형인 혜국스님께서 마침 효대에 와 계십니다. 우리 스님의 상좌들 중에서 참선을 가장 잘하시는 혜국스님을 만나는 것이 저와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명인은 깜짝 놀랐다. 작년에 충주의 석종사로 찾아가 선승 혜국을 만났던 것인데, 그때 받은 혜국의 인상이 너무나 강렬하여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내내 잊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혜국스님이 여기 계신단 말씀입니까.”
“효대에서 기도하고 계실 겁니다.”
고명인은 효대란 말에 또 한 번 더 놀랐다. 좀 전 대각국사의 시비에서 효대란 단어를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라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다 싶었던 것이다.
“효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가깝습니다. 각황전 뒤로 난 계단을 타고 오르면 됩니다.”
고명인은 혜국을 빨리 만나보고 싶었지만 혜각을 의식했다. 그러나 혜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행 시간이 끝났습니다. 다시 저는 선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고 선생은 오늘 밤 어디에서 묵으시려 합니까.”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화엄사에 머무시겠다면 제가 원주스님에게 부탁해 놓겠습니다.”
“스님, 괜찮습니다.”
“절이 불편하시다면 저 아래 호텔도 있구요.”

혜각은 종무소를 나가더니 선방이 있는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혜각의 걸음걸이에서 일대사를 해결하겠다는 결의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선방이란 절에서 가장 고요한 곳이자 가장 치열한 곳인 것 같았다. 고명인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후의를 베푼 혜각을 향해서 합장했다.

‘스님, 성불하십시오.’

동백나무 숲은 효대로 가는 계단을 따라 우거져 있었다. 햇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잎들이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고명인은 동백나무 잎들도 꽃 못지않게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단숨에 계단을 올랐다.

“혜국스님!”

고명인이 부르자, 혜국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작은 키는 여전히 강개했고, 하얗고 촘촘한 치아는 개결하게 보였다.

“고 선생, 반갑습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스님께서 여기 계신다고 하기에 올라왔습니다.”
“저는 송광사 가는 길에 우리 스님이 생각나서 들렀습니다.”
“스님, 화엄사도 일타 큰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입니까.”
“그럼요, 우리 스님께서 여기 효대에 머물며 7일기도를 했지요. 태백산 도솔암에서 내려오신 뒤의 일입니다.”

그제야 고명인은 혜각이 왜 화엄사 선방에 들어 정진하는지 이해가 됐다. 일타의 수행 흔적이 남아 있는 도량에서 스승을 추모하면서 정진하고 싶었음이 틀림없었다.

“고 선생, 이거 얼마만입니까.”
“이곳에서 스님을 뵙다니 감개무량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도량 중에서 이 효대를 참 좋아합니다. 효대, 말 그대로 효성이 어린 땅이지요. 저 네 마리의 사자 가운데 있는 분이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저기 무릎을 꿇고서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고 분이 연기조사구요. 얼마나 효성스러운 성물(聖物)입니까. 그래서 이곳을 효대라고 했을 겁니다.”

고명인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감상에 젖었다. 조금 전에 본 대각국사의 시처럼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낙엽이 굴러와 효대에 쌓였다. 낙엽은 지나간 세월의 잔해처럼 고명인의 발밑까지 굴러와 한 조각 추억인 듯 뒹굴었다.

“우리 스님이 생각나기도 하고 속가의 모친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 효대에 서면 모친께 효도를 못해서인지 만감이 교차하지요. 대각국사의 시도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대각국사의 심정도 저와 같았을 겁니다.”

고명인은 혜국을 따라 탑전으로 들어갔다. 탑전은 암자 규모로 효대 바로 밑에 아담하게 자라잡고 있었다. 젊은 스님 한 사람이 나와 혜국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스님, 찻물을 준비할까요.”
“그래줘요. 아 참 이분은 미국에서 오신 고 선생인데, 방을 하나 마련해드리세요.”
“스님은요.”
“나는 오늘 송광사로 떠날 생각입니다.”
혜국은 송광사로 갈 모양이었다.
“처사님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젊은 스님이 고명인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려는 듯 물었다. 그러나 고명인은 굳이 화엄사에 머물 이유가 없었으므로 말끝을 흐렸다.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마루를 오르면서 혜국이 다시 말했다.
“자, 저기를 보세요. 섬진강이지요. 화엄사 경내에서 섬진강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암자가 이곳이에요.”

방으로 들어간 혜국은 다탁 앞에 앉더니 차가 우려지는 동안 일타의 얘기를 꺼냈다. 고명인도 그제야 귀를 기울여 들었다. 효대에 올라서부터 줄곧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이 허전하고 어두워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 스님께서 태백산 도솔암에서 나와 바로 큰절로 가시지 않고 문경 사불산 묘적암을 들렀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부산 감로사에서 간청하자 하산하시어 무불(無佛)스님과 함께 60권 화엄경을 강설하셨지요. 강설이 끝나자 다시 우리 스님께서는 청정한 산기운을 쐬고 싶었던지 하동 쌍계사로 갔지만 당시 그곳은 절 분위기가 아주 뒤숭숭했던 것 같습니다. 4.19학생운동으로 조계종단을 지지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불교분쟁이 다시 도진 것이지요. 당시 쌍계사도 마찬가지였지요. 절을 빼앗겼던 태고종 승려들이 무리로 몰려와 시위하는 바람에 우리 스님께서 머물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우리 스님께서는 할 수 없이 화엄사로 오신 것이지요.”

그때가 1960년 봄이었다. 일타는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자신이 먼저 참회를 하고 싶었다. 일타가 기도를 한 장소는 진달래꽃과 때늦은 동백꽃이 만발한 효대의 4사자삼층석탑 앞이었다. 일타는 7일기도를 시작하면서 발원했다.

‘시비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수록 수행자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시비의 원인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내가 맑아지면 도량이 맑아져 삼세제불보살의 가피가 깃들고 신장들의 외호가 들어설 것이다.’

기도는 관광객들이 오가는 낮을 피해 밤에만 했다. 저녁예불이 끝나면 탑 앞에 나아가 헌다(獻茶)를 하고 새벽예불 때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살구나무로 만든 목탁을 두들겼다. 석가모니불을 밤새 외는 기도였다. 일타는 이미 도솔암에서 수마를 조복 받은 경지를 일군 상태였기 때문에 밤을 새우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일타의 목탁과 염불소리는 밤마다 화엄사 경내를 울리고, 효대 맞은편 지장암은 물론 일주문 밖의 절골 마을까지 퍼졌다. 간절히 기도하면 늘 그랬던 것처럼 7일째 되는 날 기도의 기운이 허공으로 뻗치어 드러났다. 불보살의 한 치 어김없는 응답이었다. 7일째 새벽에도 일타가 염불삼매에 빠져 목탁을 두드리고 있는데, 지장암의 대중들이 몰려와 합장을 했다. 효대에서 산불이 난 것처럼 방광(放光)이 일었던 것이다. 화엄사 경내에서는 효대의 방광을 볼 수 없었지만 지장암은 효대 맞은편 산자락에 위치한 까닭으로 새벽예불을 나온 대중들이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스님, 산불이 난 듯했습니다. 산불이 허공으로 치솟아 천은사 쪽으로 건너가는 것 같았습니다. 스님의 기도소리를 부처님께서 들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스님 거룩하십니다.”
날이 밝자 절골 마을 사람들도 효대로 몰려와 말했다.
“새벽에 효대 쪽만 훤했습니다. 붉은 놀 같은 것이 한동안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큰스님께서 기도하시어 그런 것입니다. 큰스님, 부디 화엄사를 지켜주십시오. 저희들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쌍계사가 싸움터로 바뀐 것은 도인이 안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던 일타 자신은 방광을 보지 못했다. 염불삼매에 빠져 있던 탓도 있었지만 자신은 정작 그런 이적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날이 조금 밝아졌을 무렵 제트기가 지나갈 때 생기는 흰색의 포말자국 같은 것이 탑 위에서 천은사 쪽으로 뻗어가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었다.

7일기도를 마친 일타는 화엄사에 더 머물기로 했다. 화엄사 대중들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마침 화엄사는 쌍계사와 달리 전강(田岡)이란 도인이 조실스님으로 계시어 불교정화라는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있었다. 거기에 방광의 도력을 보인 일타가 가담하니 귀한 비단에 아름다운 꽃이 얹히는 격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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