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아들 잃은 슬픔 불사로 승화
아버지-아들 잃은 슬픔 불사로 승화
  • 법보신문
  • 승인 2007.11.2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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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형 창원문화재연구소장 특별 기고
왕흥사-사리장치 깊이보기

글 순서

1. 최고·최대 사리그릇 발굴하다
2. 왕흥사, 임금이 배타고 들어가는 구조
3. 언제 창건 되었나-위덕왕 때 창건?
4. 아좌태자 외 역사에 없는 또 한 왕자
5. 사리 그릇 차림새
6. 유리병 대신 순금 사리병
7. 사리장치처의 궁금증
8. 금은보화-진단구? 공양품?
9. 3알의 사리는 어디로 갔나?
10. 40여 종 최고의 세공품들
11. 기타 출토품들
12. 위덕왕이 세운 두 절과 사리공양

※10, 11은 다음 호에 게재합니다.

<사진설명>왕흥사 목탑지 전경. 그 땅밑에는 사리를 넣는 사리그릇과 위덕임금의 이름과 시대들이 새겨진 글이 나왔다.


9. 3알의 사리는 어디 갔나?

바깥 사리그릇에 새겨진 글에 나오듯, 봉안하려고 어렵게 구한(?), 마련해놓은 사리는 처음에 2알(2枚)이었다. 이를 이제 사리병에 넣어 모시려고 보니 신기하게도! 3알이 되어있더라 한다立刹 本 舍利二枚 葬時 神化爲三. 여기서, 「本」은 뒤에 나오는 「葬時」의 「時」와의 자구字句로 견주어, 댓구對句로 「本時」라고 보기에는 그렇고, 본래本來나 본인本人은 할 때처럼 「이」·「이것」이나 「처음」·「본래」들로 봄이 좋겠다. 물론, 이 3알을 다 넣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신기하게) 저절로 많아진 것을 사리분신分身이라 하며, 이러한 사리분신 영험자료는 이미 수없이 보이고있는 것이다. 감응과 감통·영험이란 말로써 수많은 사리분신 자료가 모두, 깊고 애닯은 믿음과 바램의 힘 결과로 나타나는 신이神異이며, 이에 따라 또 다시 공덕은 쌓여만 가는 것. 곧, 그 정성어림에 「방광放光」-빛을 발하며 분신의 사리가 나투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분신하는 감응·감통·영험·찬탄·공덕의 힘을 내보인 그 사리가 3알은 커녕 1알도 빛나는 그 황금사리병에 발굴결과,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다만, 맑은 물만 들어 있었을 뿐인.

왕흥사의 사리차림은 조사결과, 그사이 한번도 꺼내지거나, 재봉안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궁금하다. 나라의 절-국찰國刹이 더구나,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그것도 부처 열반일에 맞춰, 기리며 봉안한 사리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설명은 하나밖에. 종교적으로 그러했듯, 또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아우의 혜왕惠王계로 이어지는 실록대로, 23해 뒤가 되는 법왕에 의해 세워지고(600, 법왕2) 무왕이 완성(落成, 634, 무왕35)한다고 공功이 돌아감에 어느날 훌쩍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합리·과학의 사실대로 말하면, 애초에 (1알도) 넣지 않은 것이고, 속인 것-그들끼리만의 담합이었다 할 수밖에 없다. 불경에, 사리는 맘따라舍利 隨意捨取라는 말도 있다하니, 모를 일. 막 돌아가실 참에 석가가 큰제자 아난阿難에게, 나의 사리공양에 어찌 매달리려는가(大般涅槃經)라고도 했으니.

사실, 초기이자 안팎으로 어지럽고 어려운 이때쯤에 사리-곧 부처의 진신사리를 얻는 게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신라도 양(梁, 武帝)나라에서 겨우 사리 몇 알(若干粒) 보내자 임금이 백관을 시켜 맞이했다 한다(549, 진흥왕10). 이렇게, 건너온 것도 기실 진짜라 믿기 어려운 형편인데, 위덕임금인들 그리 쉽게 구할 수가 있었을까, 날짜는 다가오고, 시간은 없고, 하니-겉으로 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철퇴로 내리쳐도 안 부서진다는 탄소알갱이가 결코 물로 변할 순 없는 것이다. 물은 이슬맺힘-결로현상으로 된 것 뿐. 적혀진 그 내용의 중요성만큼 또 다른 이야기 거리가 되어주는 흥미로운 것이라 하겠다.

더우기, 사리는 국가의 힘을 대신하는, 그 힘을 국제적으로 보여주고 나타내는 명분품이기도 한 것이었던 것. 곧, 일본에 사리를 보내줬다고 실록(백제 588, 신라는 623-『삼국유사』, 권3 탑상4)에 실을 만큼. 백제는 바로, 왕흥사를 세운 위덕왕이 보낸 것임이 저쪽 실록(『日本書紀』, 崇峻天皇紀)에도 적혀있는 것이다.

12. 위덕왕이 세운 2절과 사리공양

백제 서울 사비성泗城 부여에서 위덕임금이 세운 나라절國刹인 두 원찰願刹이 1400해 넘어 나타났다. 567(위덕왕14)해에 세운 능사陵寺가 1995해에, 10해 뒤인 577해의 왕흥사王興寺는 올 2007해의 발굴조사로 찾아졌다. 부여 동남쪽의 능사터는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왕흥사터는 북성北城인 부소扶蘇산성에서 건너다 보이는 백마강 건너 강가 절이다.
두 절에 다 나무木탑이 세워져, 그 땅밑에 사리를 넣는 사리그릇에 위덕임금의 이름(昌)과 시대들이 새겨진 글銘文이 나와 비로소 밝혀진 것이다.

아다시피, 백제는 문주왕(文周王, 475-477)이 임금되면서 한성漢城에서 곰나루=웅진(熊津=公州)으로(475), 다시 63해만에 성왕(聖王, 523-554)이 사비(泗=부여扶餘, 125해 동안)를 서울로 하며(538, 성왕16) 충남 땅에 자리잡아 끝을 본다.

그리하여 웅진 때는, 동성왕(東城王, 479-501)이 남북조의 남조 곧 6조六朝의 (남)제(南齊, 479-502)에 사신을 보내며, 이은 둘째아들 사마斯摩 무령왕(武寧王, 501-523) 또한 6조의 양(梁, 502-557)나라에 사신을 보내고(512년), 양 무제(武帝, 502-549)가 명호(百濟 諸軍事 寧東大將軍, 521)를 전해오며 교류하는 한편, 일본-왜倭에다 오경五經박사와 역易·역曆·의醫박사까지 보내(日本書紀) 중국과 우리 문화를 전하며 깨우쳤다.

무령왕·비릉(525·529, 1971발견)의 무덤틀墓制와 무려 108가지 2,906점 유물에서 보듯, 4보·7보들로 된 갖가지 장신구와 세공품 나아가, 해서체의 명문(誌石·買地券)과 함께 그 뛰어난 솜씨는 중국 6조(222·229-589)의 남조(420-589)문화가 어린 우아한 특징이 나타난 때다.

이어 부여 때는, 공주 무령왕의 아들 성왕(聖王, 523-554)이 옮겨와(538, 성왕16), 아버지를 이어 양梁나라와 계속 교류하여 불경(涅槃等經義)을 비롯한 문물과 모시박사毛詩博士·장인工匠·화사畵師들이 들어오고, 겸익(謙益, 律宗 시조)이 인도에서 가져온(526, 성왕4) 범어 율장(律藏-五部律)을 스님들에게 번역시켰다. 왜倭에도 율종律宗을 전하고, 불상(석가불금동상)과 불기幡蓋·경전經論 및 의·역박사들을 보냈다.

그리고, 바로 성왕 큰아들 위덕왕(威德王, 554-598) 창昌은 6조의 나라들(齊, 陳)과 교류하며, 일본에 사리佛舍利를 보내고(588, 『日本書紀』, 崇峻天皇紀) 나아가, 수(隋, 581-618)나라와도 사귀어 고구려·신라를 견제하면서, 아우인 혜왕(惠王, 598-599)과 그 아들·손자-법왕(法王, 599-600)·서동薯童 무왕(武王, 600-641)으로 이어져 갔다.

이러한, 위덕 창임금은 능사(567, 위덕왕14)를 세우고 이어 왕흥사(577, 위덕왕24)를 지었다. 이는, 능사와 왕흥사의 사리그릇인 돌함龕과 청동합에 새겨진 글에서 밝혀졌다.
곧, 능사는 위덕임금의 누나부부가 사리를 공양하여(百濟 昌王 十三秊 太歲在/ 丁亥 妹兄公主 供養舍利) 절을, 왕흥사는 죽은 왕자를 위하여 사리를 공양하여(丁酉年 二月/ 十五日 百濟/ 王 昌 爲亡王/ 子 立刹 本舍/ 利 二枚 葬時/ 神化 爲三) 절을 세운 것이다.

위덕왕(525-554-598)은 74살에, 45해나 임금으로 백제를 다스렸지만 가족사는 불운했다. 고구려 장수를 베고 병사와 함께 침식한 용감하고도 다정한 위덕태자는 30살(554)에,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신라와 싸울 때, 아들을 도우로 온 아버지 성왕이 매복한 신라군에게 살해된다.

그 충격으로 출가-스님이 되려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곧바로 즉위(30살, 554)하자 원한풀이로 계속 신라와 고구려와 싸운다.

더우기, 이번 왕흥사터 발굴로 53살(577)에는 아들까지 죽는 아픔에 절을 지었음도 알게 되었다. 이로서, 역사상 그 존재가 없었던 아좌태자阿佐太子 밖의 왕자가 있었음이 밝혀졌고, 그로부터 20해 뒤인 597해 일본에 간, 쇼토쿠聖德태자의 스승인 아좌태자에 앞서 죽은 왕자가 바로 첫 태자였을 수가 있겠다. 그리고, 위덕임금 뒤로는 아우 혜왕惠王계로만 이어졌다.

왕릉이 있는 능사陵寺는 아버지 성왕을, 왕흥사王興寺는 아들을 기리어 세운 두 절 곧, 사리를 모시고 함께 많은 공양품을 베푼 탑(절)을 세워 공주에 이어 부여 때의 문물을 잘 나타내는 비교자료가 되고있다. 바로, 남조의 6조 양나라들과 나아가, 북조와 수나라의 교류와 불교를 통하여 나라힘國力을 다지려 애쓴 자국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사터는 심초석 위에 선 심주心柱인 느티나무槐木기둥 뿌리 옆南에 사리돌함이 놓이고, 왕흥사터는 심초석 위에 판南 사리홈에다 사리그릇겹을 넣고 돌뚜껑을 덮은 차림과 새겨진 두명문의 글씨같은 서로의 차이도 차이지만, 심초석 가에서 나온 아주 뛰어난 갖가지의 많은 공양품과 더불어, 부여의 위덕임금 때 문화는 남조(420-589) 뿐만아니라 북조(386-581)의 끈까지 생각할 수 있는 앞선 공주 때의, 남조풍인 무령왕·비릉(525·529) 유물들과 반드시 비교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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