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35.
[고우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35.
  • 법보신문
  • 승인 2007.11.2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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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이 실체 없고 공이라 보는 게 ‘정견’
<사진설명>혜능 스님이 대범사에서 법문을 마치고 자리를 옮겨 37년간 법을 폄으로써 육조 스님의 행화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조계 남화선사.

22. 수행(修行)

 

도를 찾더라도 도는 보지 못하니, 마침내 도리어 스스로 고뇌함이로다.
춥다고 해서 더운 곳을 찾아다니고, 시끄럽다고 해서 조용한 곳을 찾아다니는 이런 사람은 평생 고뇌하고 만다는 말입니다.

만약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바른 것을 행함이 곧 도다.
바른 것이 뭡니까. 양변을 여읜 것이 바른 것입니다.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양변을 여의는 것으로 보고, 양변을 여읜 것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양변을 여읜 그 자리가 본질 자리이며 공이라는 자리고 실체가 없는 자리입니다. 바른 것이라고 하니까 비뚤어진 것과 바른 것을 나눠서 상대되는 두 가지로 보면 안됩니다. 양변을 여읜 바른 것을 이해하려면 연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원리가 연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연기는 단일로 독립된 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가 복합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이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 몸을 보더라도, 우리는 몸을 단일 독립된 개체로 보고 잘 입히고 먹이려고 야단인데, 세분해보면 원자덩어리이고 세포 덩어리입니다. 60조의 세포에서 어느 것을 가지고 ‘나’라고 할 것입니까. 그게 연기입니다. 잘 이해하면 그동안 했던 일들이 정말로 부질없고 잘못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나에 대해서 너무나 잘못 알고 잘못 보고 있습니다. 정신도 그런 연기현상입니다. 우리 존재를 바로 보고 바로 이해를 하고 그 사고를 바탕으로 해서 주변의 물체도 그렇게 보고 자기도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 내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 걸리는 게 많았던 것이 없어지고, 남과 비교하는 것이 없어지고 평등함을 알게 됩니다.

남과 다투고 갈등하는 그런 것이 없어요. 그런 것이 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데요, 우리의 존재원리를 알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름을 행하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바로 보자면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몸이 단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연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바로 이해하면 지혜가 나와서 지혜로서 바로 사고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바름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름을 행하는 것이 곧 도입니다.

스스로 바른 마음이 없으면 캄캄한 곳에 행하는 것과 같아서 도를 보지 못함이니라. 만약 참되게 도를 닦는 사람은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아니하나니, 세간의 잘못된 것을 보면 자기 스스로 잘못된 것이고 도리어 자기에게 허물이 있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것도 존재의 원리를 생각해서 보라는 말입니다. 본래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데 저 사람이 ‘내가 있다’고 집착을 해서 저렇게 나쁜 행동을 하고 있으니 정말로 안타깝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저 사람을 나라도 미워하면 안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봐야 하는 것이지, 잘못했다고 해서 미워하는 생각을 내면 그것 역시 스스로 잘못하는 것이 됩니다. 때문에 만약 세간의 잘못이 있다고 보면 도리어 자기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나의 죄가 있음이요, 나의 잘못은 스스로 죄가 있음이니라.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본래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데 ‘다른 사람이 죄가 있다’고 보는 것은 바로 내 죄입니다. 그러니까 내 죄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리고 내가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은, 연기현상이라는 실체를 못보고 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내 허물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잘못된 마음을 보내버리면 번뇌도 다 없어진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때부터 번뇌가 생기지요.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거기서부터 징검다리를 건너가게 되면 자기 스스로 소설을 쓰게 됩니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할진대는 모름지기 방편이 있으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파하지 말게 하라. 곧 이것이 보리의 견이로다.
의심을 파하지 말라는 것은 앞에서 ‘세간에서 공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물었을 때의 그 물음, 즉 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이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 나오는 것이니, 세간상을 여의고 밖으로 출세간을 구하지 말아라.
앞에서 ‘세간에서 어떻게 도를 닦겠습니까’하고 물었는데, 그 물음 자체가 보리를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없애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법은 세간에 있고 세간에서 세간을 여의는 것이라는 말은 세간을 떠나서 출세간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간에서 세간을 여의고, 상에서 상을 여의고, 생각에서 생각을 여읜다는 말과 같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자리가 바로 포탈라궁입니다. 몇 달씩 걸려서 그렇게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인 줄 알면 바로 그것이 출세간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실체가 있고 공인 줄 모르고 있는 것이 세간입니다.

사견이 세간이고 정견은 출세간이다.
이 세간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보는 것이 정견입니다. 세간을 내버리고 세간을 여의는 게 아니고 세간을 그대로 두고 이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보는 것이 정견이고 출세간입니다. 이거 그대로 공이라고 보면 출세간이고, 이것이 있다고 보면 바로 세간입니다.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보는 것이 출세간입니다. 우리가 보는 견해에 따라서 세간과 출세간이 벌어지는 것이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와 정을 다 쳐 없애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함이로다.

우리가 삿되다 바르다 하니까 이것을 또 상대되는 ‘사와 정’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견은 삿되고 바름을 초월하는 정견입니다. 그리고 보리의 성품은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이는 다만 몰록 깨닫는다(頓敎)고 가르치는 것이며 또한 이름이 대승이 됨이니, 미혹해서 누겁을 지나나 깨달음은 즉 찰라가 된다.
교화하는 것을 행화라고 합니다. 중국에 가면 지금도 마조 스님 행화도량·육조 스님 행화도량이라고 부르는데, 행화도량은 그 스님이 오래 주석하면서 교화를 많이 한 장소를 말합니다. 육조 스님은 남화선사에서 오래 계셔서 행화도량을 남화선사라고 합니다.

23. 행화(行化)

대사가 말하되, 선지식아 너등은 이 게송을 다 외워 가지라. 게송을 의지해서 수행하면 혜능과 거리가 천리라도 항상 혜능 곁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 게송을 의지해서 수행하게 되면, 혜능 스님과 1500년이라는 시차가 있더라도 항상 곁에 같이 있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수행하지 않으면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천리를 떨어져 있는 것과 같으니 각각 스스로 닦으면 법을 서로 가진 것이 아니리요.
우리가 이 게송을 의지해서 각각 수행하면 법을 항상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대중은 흩어져라. 혜능은 조계산으로 돌아가리라.
이제 법문을 다 마치셨습니다. 여기서의 대중은 재가대중을 말하고, 대범사에서 조계산 남화선사까지는 거리가 대략 50여리 정도로 멀지 않습니다. 육조 스님이 법문을 다 마치고 조계산으로 갈 것이니 대중은 모두 흩어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덧붙이십니다.

대중 가운데 만약 의심이 있거든 저 산(조계산)으로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해 의심을 파해서 함께 불성을 보게 하리라.
대범사를 떠나지만 남화선사(보림사)로 와서 물으면 대중을 위해 의심을 파해서 불성을 보도록 하겠다는 말이지요.

함께 자리한 관료와 도속이 화상에게 예배하고 찬탄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으니, “훌륭함이라 큰 깨달음이여. 옛날에 듣지 못한 바로다. 영남에 복이 있어서 생불이 이에 있은 것을 누가 능히 알았으리요” 하고는 일시에 대중이 흩어졌다.
대범사 법문이 다 끝났습니다. 대범사에서의 법문은 일반적으로 하신 법문이고, 이제부터는 개개인 스님을 만나면서 거기에 맞게 법을 설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공부하는데는 개개인에 맞게 설하신 내용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여기 개개인의 스님이 되어서 육조 스님 법문을 듣는다고 생각하면 앞에 법문보다 더 구체적이고 리얼할 것입니다.

대사가 조계산으로 가니 소주·광주 두 고을에서 교화를 행하기를 40여 년이다.
연대로 보면 37년 동안 소주와 광주에서 교화를 하셨습니다. 오조 홍인 스님에게서 깨달은 후에 16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하다가 광주 시내에 있는 광효사라에서 삭발수계를 합니다. 그리고 교화는 소주로 가서 대범사와 남화선사에서 하고, 국은사로 가서 절을 짓고 열반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돈황본에는 국은사로 간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 문인을 논한다면 출가한 스님과 세속 거사가 35천인이다. 설해서 다하지 못함이니라.
소주·광주 지역에서 육조 스님 문하에서 공부한 스님들이 많다는 말인데요, 여기서 말하는 35천인은 1500명을 말합니다. 제자를 다 논한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만약 종지를 논한다면 단경을 전해주어서 이것으로 의지하고 믿음을 삼게 하셨다.
육조 스님 당시에는 공부를 하다가 깨달으면 단경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육조 스님까지는 가사와 발우를 주고받았는데, 육조 스님 이후에는 의발을 전하지 않고 단경을 전해준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만약 단경을 얻지 못하면 곧 법을 이어 받지 못함이니, 모름지기 거처와 연월일과 성명을 알아서 번갈아 서로 부촉하되, 단경을 이어 받음이 없으면 남종 제자가 아니다.
단경을 갖지 못한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즘은 누구의 인가를 받았느냐고 하는데, 그 당시는 단경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단경이 없는 사람은 인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남종 북종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남쪽에 혜능 스님이 살아서 남종이라고 하고, 북쪽에는 신수 스님이 살아서 북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남종의 제자는 혜능 스님의 법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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