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곁의 지목행족]20. 영축총림 율주 혜남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한국 계맥 복원 발원한 자장의 후인

신라의 대국통 자장율사는 신라를 동방의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그 실천 가운데 하나가 영축산 한 자락에 통도사를 개산하고 그곳에 계단을 조성해 중국에서 모셔 온 부처님 진신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이런 노력으로 당시 신라의 백성 10명 가운데 9명이 계를 받았다고 하니 지계 실천은 민족의 뿌리가 되어 신라의 국력을 형성하고 찬란한 정신문화를 꽃피우는 바탕이 되었을 터이다.

천년의 세월이 찰라 간에 흘러버린 지금. 가물거리는 그 먼 천 년 전 신라의 지계 정신은 여전히 통도사에서 유유히 계승되고 있는데 바로 그 중심에 자장 율사의 계율을 한 치의 어그러짐 없이 전하고 있는 스님이 있다. 바로 혜남 스님이다.

스님은 은해사 승가대학원장을 역임하고 제방의 강원에서 강의한 대 강백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계율 근본도량인 통도사에서 스님이 맡고 있는 소임은 총림의 율원을 관장하는 율주다. 2004년 이름만 유지하고 있던 영축율원을 되살리면서 정식으로 율원장에 임명된 뒤부터 옛 자장율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지계 정신을 더욱 부흥시키기 위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계율을 물어오는 이들에게 스님은 정작 “잘 모른다”며 손 사례를 치고는 말을 아낀다. 계율은 말이 아니라 몸소 실천해야 하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얼마 전 중국으로 계단 순례를 다녀왔다는 사실에서 한국 율원의 뿌리를 찾아 지계정신을 복원하고자 하는 스님의 외향적인 노력들이 잡힐 듯 다가온다.

승가대학원장역임…대강백으로 유명

“중국에는 율종 사찰이 있지만 대부분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파괴됐거나, 옛 정취를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기대했던 정업사에 오르는 길의 연도에는 선종 사찰에서나 봄직한 선어록의 구절들로 채워져 있더군요. 수많은 스님들이 계를 받았을 계단은 사라져 버린 채 화려한 전각만이 들어서 있었지요. 또 대흥선사의 방등계단은 다행히 계단의 원형은 보존돼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율종 사찰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유물이나 기록이 없었습니다. 참 안타까웠지요.”

말이 나온 김에 낙산대불에 대한 회고도 이어졌다. “당나라 현종은 즉위 초기에는 당시 유·불·도를 적절하게 배려하고 활용해서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부처님인 낙산대불을 조성하는 불사에도 현종은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도교를 지나치게 숭상하면서 나라를 위기 속에 빠트리게 되었지요. 종교편향은 결코 국가지도자의 자세가 될 수 없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대 강백인 혜남 스님의 말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법상에서도 아는 만큼만 설명하겠다며 설법을 풀어 놓는데 오히려 불자들에게는 그 법문이 더 명료하고 진솔하게 다가간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의 ‘율사’에 대한 정의도 간결하다.

“『속고승전』에 보면 큰스님을 판단하는 10가지 항 목 중에 ‘명율(明律)’이 있을 만큼 계율을 중시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율(持律)이 아니라 명율이라는 점이지요. 계율을 지키는 것은 승가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합니다. 명율이란 계율에 밝은 것을 뜻하는데 승가 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계율을 잣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스님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율주가 된 것”이라며 겸손해 하지만 영축총림의 사부대중을 밝은 계율의 세계로 인도하는 명율사임은 자타가 공인하는 진실이다. 출가 이후 스님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한창 혈기 왕성한 20세 때에 고향 창녕관룡사로 입산 출가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면서 삶의 서글픔을 경험했고, 이후 풀 한포기 베는 것조차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해 자신의 몸을 벤 것처럼 아픔을 느꼈던 여린 청년은 경쟁과 이기심, 질투가 없는 세상을 발원하며 그 길로 수행납자의 길을 걷기를 발원한 것이다.

관룡사에서 행자 시절을 보내고 계를 받기도 전, 군대에 입대한 스님은 제대 후 대각사에서 경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제방 강원에서 두루 공부를 이어 갔다. 출가 전부터 『자치통감』 등을 읽으며 중국 고서를 접했던 스님이기에 강원에서 배우는 경전과 논서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했고 누구보다 간경의 환희에 젖는 횟수가 많았다.

특히 당대 대 강백이었던 운기 스님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모든 배움의 과정을 끝내고 선원에서 안거를 지내던 스님은 바람결에 대흥사에서 한영 스님의 강맥을 이은 운기 스님이 강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안거를 접고 운기 스님을 찾아갔다. 당시 스님은 여러 강원에서 강의를 들은 터였지만 운기 스님의 혜안에 감명을 받은 스님은 초심으로 돌아가 운기 스님 문하에서 치문 수업부터 다시 들었다. 그만큼 스님의 학구열은 주위의 사표가 될 만큼 치열했다.

운기 스님으로부터 『화엄경』과 『사산비명』 수학을 받는 것으로 남다른 배움의 과정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전강을 받게 됐다. 당시 전강을 기념해 받은 한영 스님이 직접 수기한 『사산비명』은 때때로 꺼내 읽어 손때가 가장 많이 묻은 애장 서적이다.

계율, 옳고 그름 판단하는 잣대

그러나 스님의 배움 과정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운기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고 대각사에서 청년회 지도 법사를 지내던 스님은 돌연 일본 유학행을 결심한다. 당시 일본어로 된 불서를 접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느낀 스님은 1년 동안 한국에서 일본어를 공부했지만 큰 진전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왕 공부를 한다면 일본에 가서 제대로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일본에서 대정대학 동양학부에 입학한 스님은 그 때부터 중국의 여러 종교와 철학을 배우면서 『화엄경』 공부에 매진했다. 10년 간 머무르며 유·불·도 삼교 관계를 주제로 석·박사 과정까지 졸업한 스님은 귀국하자마자 해인사 강주를 맡아 제방에서 강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선방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선방 생활을 오래 하지 않은 것이 항상 아쉬움으로 남아있었거든요. 그런데 강주 제의가 들어오고 그렇게 시작한 강의 생활이 법주사, 중앙승가대학, 은해사승가대학원, 통도사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죠.”

통도사 강주를 맡고 있던 스님은 2003년 당시 전계사를 맡고 있던 현산 스님의 입적으로 전계사 자리가 공석이 되자 스님에게 그 자리가 맡겨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율사의 길은 생각도 못했던 터였다. 그러나 사중의 스님들은 모두 스님이 맡아주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님은 결국 전계사를 맡으면서 강사 자리를 내 놓았고 대 강백은 그렇게 율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전계사를 맡고 보니 영축총림 사중에는 율원이 유명무실한 상태였습니다. 자장 율사가 창건한 도량에 율원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남모르게 가슴앓이를 했지요. 마침내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영축총림 임회에서 취운암에 율원 개원을 의결했고 오늘날 이렇게 명실상부한 총림 율원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2004년 새롭게 개원한 영축율원은 현재 정규과정 2년, 전문과정 3년까지 총 5년 과정으로 12명의 스님들이 율사의 길을 걷고 있다. 매일 아침 진행되는 율원 수업은 율원생 간의 논강으로 시작된다.

지계정신 회복위해 매진할 터

그러면 영축율원이 다른 율원과 다른 차이점은 무엇일까. 스님의 대답은 명료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계율도량이라는 점입니다. 한국 사찰은 선불교가 중심이지만 영축총림 통도사는 자장 율사가 계를 설하기 위해 설립한 계율의 근본 도량인 점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곳에서 계를 연구하고 홍포하는 것 자체가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특히 통도사는 자장 율사 때부터 설해진 사분율과 대승계인 범망경, 즉 누구나 받아 지니는 보살계에 대한 연구가 보다 전문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계율을 공부하는 스님들은 모두 학구열이 높고 지계 정신도 철저하지요. 앞으로 계율에 대한 연구가 더욱 심화를 이루어서 그 동안 승가 사회에서 다소 소외된 계율의 정신을 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계사를 맡으면서 읽기 시작한 『사분율』을 이제 겨우 다 보았다”는 혜남 스님은 “율장과 그와 관련된 논서를 보자면 평생을 보아도 시간이 모자란다”며 여력이 닿을 때까지는 율장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스님에게 또 한 가지 소박한 발원이 있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모든 소임을 놓을 때 선방 근처에서 지내고 싶다는 것. 수행자에게는 바람처럼, 물처럼 살고픈 운수납자의 삶에 대한 동경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귀띔한다.

스님은 “삼귀의와 오계, 그리고 보리심을 발하는 삶”을 강조한다. 근본에서 시작되는 참된 불자의 가치관이 바로 지계의 근본정신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은 무엇보다 『화엄경』의 ‘보현행원’에 있다는 것. 스님의 발원은 천 년 전 화엄불국토를 염원하던 자장 율사의 행적과 닮아 있다. 

양산=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