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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벗은 북한산 삼천사지

기자명 법보신문

ⓛ 흩어진 역사 파편 맞춰 옛 모습 찾은 고려 성지

서울역사박물관 김 우 림 관장 특별기고


지난 11월 5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번지 삼천사지(三千寺址) 탑비 구역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대지국사 법경 스님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명문비편 등 10~13세기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삼천사는 661년 원효 스님에 의해 창건된 후 법상종의 중심사찰로 11세기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크게 융성했다가 임진왜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북한지』 등에 극히 간략한 언급만 남아있을 뿐 이에 관한 문헌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삼천사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 삼천사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서울역사박물관 김우림 관장이 상세히 소개한다.  편집자

<사진설명>삼천사지탑비구역 전경. 증취봉 능선 중단부(해발 342.4m) 일단을 정지하여 탑비전지와 대지국사탑비를 세웠다.

<사진설명>탑비전지 근경. 삼천사지 본사역을 바라보며 남서향 하고 있는 건물지로 원형주초와 고맥이석을 이용하여 건물을 축조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 정도의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서울은 수도 개경과 더불어 3경(京)의 하나인 남경(南京)이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길지(吉地)라 평가되어 고려시대 내내 천도(遷都)를 대비하여 궁궐과 객사 및 향교, 사찰 등 많은 도시 시설들을 계획하고 건축했다. 특별히 국교로 공인된 불교 사찰이 남경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역대 왕들의 행차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사진설명>청동사리합. 양식 및 연대로 보아 대지국사 것으로 추정되나 아쉽게도 내부 사리구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 남경의 사찰로는 승가사, 진관사, 삼천사, 중흥사, 태고사, 미타사 등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의 사찰은 개경이 아닌 남경의 북쪽 변두리 북한산을 중심으로 한 곳에 있었다. 남경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나 외곽지역에 있었던 점이 특이하다.

고려시대 사찰은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중창(中創)이나 신축을 통해 가람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일부 사찰은 폐사되어 터만 남아 있거나 사찰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석물(石物) 몇 점씩만 남아있는 경우도 흔하다. 북한산의 중흥사지와 삼천사지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중흥사지는 최근 발굴조사에서 사찰의 역사와 성격이 규명되었으며, 조사과정에서 발견된 유구에 대한 보존대책을 세우고 있다.

고려시대 주요사찰 삼천사 발굴

그러나 삼천사지는 폐사된 이후 축대와 일부 석물 이외에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폐허화된 상태이며, 그나마 사찰의 흔적으로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보물657호)과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의 귀부(龜趺)와 이수 및 지면에 노출된 일부 건물지 유구 정도가 남아 있어 옛 삼천사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삼천사지 탑비가 있던 자리에는 당당한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음에도 아직까지 이렇다할만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고 그나마 남아있는 석물이 계속 훼손되고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시 전역에 산재하는 문화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를 하였다. 조사 결과 수많은 유적을 찾아내었고, 조사 내용을 토대로 서울시 문화유적분포지도와 DB를 구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적의 훼손 정도가 심해 조사가 불가피한 유적을 대상으로 시·발굴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첫 번째 발굴 대상지로 북한산 삼천사지 탑비가 있는 구역을 선정하고, 문화재청으로부터 학술발굴조사 허가를 받아 2005년 9월 12일부터 2007년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삼천사지로 가기 위해서는 은평구 진관내동의 대한불교 조계종 삼천사 주차장을 지나 삼천리골로 들어가야 한다. 조계종 삼천사의 한문 표기는 ‘三千寺’로서, 이는 고려시대 법상종 삼천사(三川寺)와는 관련이 없는 절이다. 현재의 三千寺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마애여래입상 한 구가 있는데 이 입상은 고려시대 三川寺와 연관 있는 불상이다. 삼천리골에서 문수봉 방향으로 약 10분 가량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 왼편 산자락에 대웅전 등 삼천사의 주요 건물이 있었던 삼천사 사역(寺域)이 나타난다. 1968년 당시, 북한 무장공비의 1·21사태로 이 일대가 민간인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삼천사지 사역에 중대규모의 군대 막사가 세워지고, 연병장을 조성하면서 넓고 편평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발굴 대상지는 이 등산길에서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20분 가량 더 올라가서 증취봉 아래 산중턱에 있는 대지국사 탑비유적이다.

삼천리골 등산길 곳곳에는 기와편과 도기편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이 흩어져 있다. 또한 삼천사 주차장에서 약 30분간 올라가면 그곳에도 옛 삼천사의 건물지가 있는데, 이러한 유물과 유적의 흔적은 진관내·외동을 비롯한 북한산 일대가 고려시대 삼천사의 사역이었음을 증명한다.

얼핏 보아도 방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고려시대 삼천사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고, 가람은 어떻게 배치하였을까.또 삼천사가 배출한 인물은 누구이고, 고려시대 삼천사는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던 절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갖게 될 법하다.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 매우 제한돼 있다. 우선 폐사로 말미암아 폐허가 된 상태인데다 폐사 이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문헌 사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사료인『고려사(高麗史)』에조차 삼천사 기록은 단 두 줄뿐이다. 고려 현종 정묘 18년(1027) 조에 “삼천사의 승려들이 금지된 것을 범하여 술을 빚은 쌀이 합계 360여 석이오니 청컨대 법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거늘 이를 받아 들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유일한 삼천사 관련 기록이다. 삼천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지리서에서도 일부 올라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등에 보면 삼각산에 삼천사가 있는데, 거기에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주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다는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지국사비명이다. 바로 삼천사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단서인 것이다.

국사(國師)는 고려시대 승직(僧職)의 최고 권위이다. 통상적으로 왕사(王師)를 거쳐 국사로 임명받는데, 이곳에 대지국사비명이 있다는 것은 삼천사와 대지국사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시 말하면 삼천사의 승려가 국가로부터 국사로 인정받았으며, 이 승려를 기리는 비를 삼천사에 세우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법상종 사찰…주지는 법경 스님

<사진설명>대지국사탑비 귀부. 높이 137.5㎝, 넓이 240㎝, 길이 270㎝크기로 용의 머리와 흡사하며, 배면(背面) 귀갑문에 ‘王’字 문양이 새겨져 있다.

또한 1027년에 삼천사의 승려들이 술을 빚었다는 기사에서 적어도 1027년 이전에 삼천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지국사는 법경(法鏡) 스님을 일컬으며, 삼천사의 주지를 지냈다. 그는 삼천사에 있는 동안 왕사가 되었으며, 이후 국사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냈다는 내용이 개경 현화사비명(1021년)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소략한 문헌자료를 보충해 줌으로써 산산이 흩어진 역사의 궤적을 바로 맞출 수 있게 하는 실물 자료가 바로 명문비편(銘文碑片)이다. 언제 누가 무슨 까닭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지국사탑비의 비신은 이미 산산이 깨어져 사방에 흩어진 상태였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방문했던 선비들이 지표에 드러난 비편 일부를 수습하여 소개한 적이 있고, 196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이 제보를 받고 현장에 나가 비편 일부를 발견하고 이를 보고한 자료가 있지만 삼천사의 성격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얻어낸 최대의 성과는 고려시대 거대사찰 삼천사의 성격과 법상종의 태두였던 대지국사 법경의 이력을 밝힐 수 있는 다량의 명문비편을 수습한 것이다.

<사진설명>대지국사탑비 이수. 앞뒷면에 각각 두 마리 용을 대칭적으로 배치했으며,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장면을 운문과 더불어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비편의 내용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삼천사는 고려시대 법상종(法相宗)의 사찰이다. 법상종은 유식종(唯識宗) 또는 중도종(中道宗)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법상종의 경전으로는 『제심밀경』, 『성유식론』, 『유가사지론』등이 있다. 우주 만유의 본체보다도, 현상을 세밀히 분류하여 설명하는 종파이다. 신라의 원측(圓測) 스님이 중국 당나라의 현장(玄奬) 스님으로부터 배워 와서 신라에 도입한 이후 경덕왕(景德王) 때인 8세기에 진표 스님이 금산사에서 이 종파를 크게 중흥시켰다고 한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대부분의 사찰이 법상종 계열이 되었을 정도로 당시 고려 최고의 종파중의 하나였다. 익히 알려진 개경 현화사도 법상종의 사찰이며, 이 절의 초대 주지였던 대지국사 법경은 두 말 할 나위 없는 법상종 승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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