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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인연 60.

기자명 법보신문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참선과 불학, 염불, 기도 등 불가의
모든 방편이 한데 어우러진 화엄의 바다가 돼야 하네.
그게 연극 같은 인생 멋들어지게 사는 일이 아니겠나.”

제 12장 보살의 길

 혜국은 차를 한 잔 더 마신 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일타가 화엄사를 떠나 해인사로 간 얘기까지 마저 했다.

“화엄사 하안거를 마친 우리 스님께서는 해인사 퇴설당으로 갔지요. 당시는 퇴설당이 선방이었거든요. 거기서 지월스님, 서옹스님을 모시고 2년 정도 정진하셨지요. 그런데 우리 스님을 조계종에서 놔주지 않았지요. 1962년 4월에 정화대책 중앙종회비상종회의원으로 발탁해 율장 부분을 담당케 했지요. 그런 뒤 그해 8월에는 정식으로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출됐고 더불어 교육위원, 감찰위원, 좬우리말 팔만대장경좭 역경위원까지 피선돼 많은 일을 하시게 됐어요. 실력을 인정받아 그런 소임들을 맡게 된 것이지요. 역경위원으로 법정스님과 잠시 일을 함께 했다고도 그래요.”

“송광사 불일암에 계셨다는 법정스님입니까.”
“맞습니다. 당시 법정스님은 우리 스님과 같이 해인사 관음전에 계셨던 거 같습니다. 우리 스님 말씀으로는 법정스님 바로 옆방에는 스님들이 번역한 원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서울에서 내려온 교수와 학자들이 날마다 모여 번역한 원고를 점검하곤 했던 거 같습니다.”

“일타스님 원고도 거기에 있었겠습니다.”
“율장에 대한 원문을 5백매 가량 번역하여 넘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 스님들이 번역한 원고도 양보다는 질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우리 스님께서 저녁공양을 하시고 나서 차를 한 잔 마시러 법정스님의 방을 갔다고 합니다. 문 앞에 이르니 방안에 모인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고 그래요. 번역원고의 수준을 가지고 1급이니 2급이니 5급이니 하고 논하고 있었는데, 우리 스님의 원고를 다른 사람에 비해 어린 나이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이력을 따져 그랬는지는 몰라도 최하급으로 치고 있더랍니다.”

당시 일타의 나이가 고작 30대 중반이었으므로 율사 자운이나 운허 같은 대강백과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번역한 원고를 놓고 등급을 매기는 것은 원고료를 차등지급하기 위해서였다. 권상로 박사 같은 대학자의 실력과 전문성을 무시하고 모두 똑같이 지급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일타는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더구나 원고를 쓰는 글쟁이는 일타가 다다르고자 하는 구경(究竟)도 아니었다. 일타는 ‘자신이 갈 길이 아니다’라고 판단하여 원고 집필하는 일을 미련 없이 단념했다.

“우리 스님께서는 운허스님께서 부탁한 좬오분율좭을 몇 백 장 번역하다가 그만 두고 그 원고를 운허스님께 돌려주었다고 해요. 그러자 운허스님께서 ‘에이구, 수좌 하고는 일 못한다’고 하며 월운스님에게 맡겨 마쳤다고 합니다. 우리 스님은 훌훌 털고 친한 도반인 도견스님과 함께 제주도로 가버렸지요. 바다에서 헤엄을 치다가 지쳐서 돌아가실 뻔했던 일도 그때 발생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제주도로 간 그때가 1964년 여름이었는데, 일타는 다시 뭍으로 돌아와 동안거를 극락암에서 보냈다. 극락암에는 일타에게 오래 전부터 감화를 주었던 경봉선사가 조실로 있었다. 일타는 선방의 입승을 맡아 경봉의 상좌인 명정을 비롯하여 여러 젊은 수좌들의 선배 입장에서 용맹정진을 하였다. 그리고 나이 어린 비구니스님들이 찾아오면 기력이 떨어진 경봉을 대신해서 법문을 해주었다. 비구니스님들이 가끔 극락암으로 올라왔는데, 경봉은 선방 입승인 일타에게 오대산 연비나 태백산 도솔암 수행담을 들려주도록 권유하곤 했던 것이다.

경봉의 가풍은 전강과 또 달랐다. 경봉은 승속을 불문하고 극락암을 찾는 이에게 물었다.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길 없는 길’을 물으니 대부분 사람들은 대답을 못하게 마련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지만 실제로는 어리둥절하다가 물러나 돌아가곤 했다. 그러면 경봉은 돌아가는 사람의 등에다 대고 소리쳤다.

“대문 밖을 나서면 거기는 돌도 많고 물도 많으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도 말고 물에 미끄러져 옷도 버리지 말고 잘들 가거라.”

헛눈 팔아 화(禍)를 불러들이지 말고 눈앞을 바로보고 살라는, 즉 현전일념(現前一念) 하라는 경봉 특유의 경책이었다.

또한 경봉은 수행자들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도인이 한가한 것은 마음이 한가한 것이지 결코 삶이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순간순간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바로 도인인 것이었다.

경봉이 거처하는 토굴을 삼소굴이라 불렀는데, 그 삼소굴에 들어가면 빈대 똥이 드문드문 밴 벽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

5, 6, 4, 3 등의 산만한 숫자가
어찌 1, 2의 실로 다하기 어려움과 같겠는가
몇 줄기 구름 빛은 산봉우리로 피어오르고
시냇물 소리는 난간에서 들린다
고운 것은 미워하고 싫은 것은 즐거워하도록 노력하련다
큰 활용은 미간조차 꿈쩍 않는 것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어다.
(할 말이 있는 이는 10분 이내로 하고 나가도록)
五六四三不得類
豈同一二實難窮
幾般雲色出峰頂
一樣溪聲落欖前
愛嗔不愛喜
大用不楊眉
夜半三更見燭舞
(談話人十分以內言之)

경봉의 게송은 오도한 경지를 노래하고 있지만 실제로 경봉이 말하고 싶은 바는 괄호 안의 쌀쌀맞은 문장이었다. 화두를 든 수행자는 한 순간도 쓸데없이 낭비하지 말고 촌음을 아끼라는 당부였다.

일타 역시 정진하는 동안 틈틈이 삼소굴에 들러 경봉의 법문을 들을 때마다 10분을 넘긴 일이 없었다. 74세의 경봉의 얘기를 길게 듣고 싶을 때는 삼소굴로 가지 않고 경봉이 백운암까지 산책하는 시간을 잡았다.

어느새 이월이 되어 동안거를 해제하는 날이 되었다. 신도가 대중공양을 하여 모처럼 공양간에는 떡과 과일이 넘쳤다. 행자들이 달여 부처님에게 올린 차의 향도 법당 안을 적셨다. 그런가 하면 선방 옆 산자락에 자생하는 홍매화는 흰 잔설 속에서 더욱더 붉게 만개해 있었다. 경봉은 법당의 법좌에 올라앉아 극락암 대중들을 향해 동안거 해제법문을 하기 전에 창을 하듯 게송을 읊조렸다.

수행자는 세 가지가 공하고 하나마저 공하니
모든 빛과 소리 본래 가풍이네
숱한 어려움 자중해서 견디니 동심으로 돌아가고
천 번 변해도 옛 주인공 언제나 여여하네
도인의 가슴속 언제나 활기 넘치고
붉은 매화 흰눈 달빛 속에 향기롭네
떡과 과일 준비하고 산차를 달이는데
동자가 홀연히 옛 종을 울리네.
行者三空又一空
都盧聲色本家風
萬難自重孩兒性
千變如常舊主公
大道胸襟生活氣
香梅雪月共華容
齋餐備滿山茶熟
童子忽來打古鐘

일타는 동안거를 난 누구보다도 감개무량했다. 1953년에 통도사로 돌아와 천화율원에서 자운의 권유로 율장 전서를 열람하던 중 극락암으로 올라가 경봉을 만난 지 실로 12년 만이었던 것이다. 경봉의 멋들어진 법문은 언제 들어도 신심이 났다.

해제법문이 끝난 뒤 일타는 따로 경봉에게 불려가 따뜻한 격려를 받았다.

“해인사로 간다고 했던가.”
“앞으로는 돌아다니지 않고 해인사 선방에서 10여 년 살겠습니다.”
“그래, 생각 잘했네. 이왕 수좌가 되었으니 한바탕 멋들어지게 살아 보게나.”
“어찌 사는 것이 멋들어진 인생입니까.”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참선과 불학, 염불, 기도, 다도 등 불가의 모든 방편이 한데 어우러진 화엄의 바다가 돼야 하네. 그게 연극 같은 인생 멋들어지게 사는 일이 아니겠나.”
일타가 삼배를 하고 일어서려 하자, 경봉은 즉석에서 시자에게 먹을 갈게 하더니 일필휘지로 게송 하나를 써 주었다.

날마다 도의 빛을 발하여 참됨 또한 넘어섰네
아미타불 동산에서의 봄인들 아랑곳하랴
청정범행은 매죽이나 금옥에나 비교할까
도처에 향기를 떨쳐 세상을 새롭게 하네
日日道光亦超眞
彌陀苑裏不關春
行如梅竹如金玉
到處香聲振世新

일타의 도광(道光)이 참됨을 넘어서고 청정한 행실이 매화와 대나무 같으니 도처에 향기를 퍼트려 세상을 새롭게 할 것이라는 일타를 격려하는 경봉의 게송이었다. 이와 같이 경봉 회상에서 동안거를 보낸 일타는 다시 걸망을 맸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극락암 일주문을 지나 해인사로 향했다.

혜국은 찻자리를 정리했다. 찻잔을 씻어 다탁에 하나하나 정리하더니 다포를 덮었다. 송광사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고명인은 다급하게 물었다.

“스님, 차편은 마련되어 있습니까. 없다면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혜국은 고명인의 제의를 거절했다.

“아닙니다. 여기서 구례역으로 나가 기차를 타고 순천역으로 가면 송광사 가는 시외버스가 있습니다. 고 선생은 화엄사에 볼 일이 있어 온 것이 아닙니까.”
“화엄사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스님, 제가 송광사까지 모시겠습니다.”
“고 선생에게 미안해서 그렇습니다. 나 때문에 송광사로 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나야 뭐 지금은 안 계시지만 살아생전에 덕을 베푸신 구산스님의 부도도 참배하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만.”

“송광사도 일타큰스님께서 출가 초기에 수행을 하신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혜국은 고명인의 제의를 완곡하게 뿌리쳤다.
“일타 큰스님을 아시려면 스님께서 수행하신 모든 곳을 굳이 순례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 수고를 하십니까.”
“그렇다면, 스님…….”
“바다의 짠맛을 알려고 동해나 남해, 서해의 모든 바다에 손가락을 담글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고명인은 혜국이 말하는 바를 이해했다.

“스님, 알려주십시오.”
“태백산 도솔암을 가십시오. 그곳에서 단 며칠만이라도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해보십시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 스님의 살림살이를 눈치 챌 것입니다. 우리 스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태백산 도솔암이 어디에 있습니까.”
혜국은 미소를 짓더니 단정적으로 말했다.

“태백산 도솔암을 빼놓고 우리 스님이 수행했던 곳이라 하여 돌아다니시는 것은 마치 우리 스님의 거죽만 보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우리 스님의 골수를 보시려면 태백산 도솔암으로 가서 참선을 해봐야 한다, 이겁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지금 태백산 도솔암으로 가시겠습니까.”
“스님을 송광사까지 모셔다 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제야 혜국은 고명인의 청을 받아들였다. 혜국은 탑전을 나와 다시 효대로 오르더니 탑을 향해 합장을 하고는 내려왔다. 혜국의 등 너머로 펼쳐진 하늘이 쪽빛처럼 푸르렀다. 고명인은 하늘빛이 자신의 가슴까지 적시는 듯하여 잠시 전율했다. 고명인은 자신도 모르게 합장하며 관세음보살을 외었다.
“나무관세음보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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