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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쓰는 근현대 불교사] 37. 범종·불구 등 모아 군수물품 지원

기자명 법보신문

총본사 5만3000원 일제 헌납
해인사 등 군용기 1대씩 상납
국방헌금 모금에 31본산 동원

 

<사진설명>조선불교 조계종 종무원에서 헌납한 5대의 전투기 가운데 한 대인 ‘조선불교호’.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에 기습 폭격을 가함으로써 1937년 중국과 전쟁을 시작한 이래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을 확대시켰다. 남방으로 필리핀과 수마트라섬과 자바섬을 점령하고, 미얀마에까지 이르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도발의 명분을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동아시아를 방어한다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수호라는 데서 찾았다. 전쟁이 확대되어감에 따라서 일본은 인력부족과 물자부족이라는 위기 상황에 봉착하였다. 그 대안으로 도출된 것이 ‘국민총력체제’이고, 후방의 지원을 강화하는 ‘총후보국’ 체제였다.

총독부가 불교계를 통괄할 수 있는 총본사를 설립한 목적도 종래의 31본사 체제 때보다 효율적으로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한데 있었다. 이른바 ‘황도불교’ 체제 아래서 불교계는 어떤 방법으로 전쟁에 미쳐 날뛰는 일본을 지원하였을까. 조선불교 조계종은 종정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교시를 발표한다.

‘태평양전쟁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영미 제국주의를 구축하는 성전이다. 이 성전에 조선의 모든 승려와 교도들은 황군을 신뢰함과 동시에 관헌의 지도에 복종하여 결사보국의 정신으로 충성을 다하라.’

당시 종정은 방한암이었으며 그는 일찍이 오대산 상원사에 거처하면서 산문 바깥출입을 삼가하였다. 그는 종정이 되더라도 산문 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종정직을 수락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불교계는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전쟁지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총본사는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부터 두 차례에 걸쳐 승려와 모든 불교도들에게 비행기 헌납을 위한 헌금을 강요하였다. 각기 본사 사법에 명시된 법정지가에 비례해서 분담금을 배정하여 비행기 헌납을 강행하였다.

1941년 11월 17일 태고사 대웅전에서 개최된 중앙종회에서는 군용기 헌납을 위한 헌금 액수를 정하였다. 승려는 1인당 최저 1원 이상 10원까지, 사찰의 사무직원과 부속기관 직원들은 월봉의 1할 이상, 신도들은 10전 이상씩을 헌납해야 했다. 만일 이들로부터 징수하지 못할 경우 부족분은 사찰 경비에서 보조하도록 하였다. 총본사는 이렇게 모금된 5만 3천원을 1942년 1월 31일자로 조선군사령부에 헌납하였다.

<사진설명>조선불교 조계종 제2회 중앙종회 개최 안내문. ‘일본군에 대한 감사결의안’그리고 ‘군용기 헌납에 대한 결의안’이 상정돼 있다.

1944년에 마찬가지 방법으로 태고사가 중심이 되어 전조선 사찰에서 모금한 8만원을, 7월 20일 종무총장 이하 4명의 부장들이 경성부 주재 해군 무관부를 방문하여 헌납하였다. 이밖에 해인사·통도사·보현사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1대씩 군용기를 헌납함으로써 조선불교계에서는 도합 5대의 전투기를 헌납하였다.

1944년 11월 10일 제6회 중앙종회에 참석한 31본산 주지 및 총본사의 직원들은 일본 해군의 필리핀 해전과 대만 해전의 승리를 감사하는 뜻에서 국방헌금 1천 원을 모아서 매일신보사에 기탁하였다. 모든 사찰 입구에는 황군위문금을 모으는 위문함이 놓여 있었다. 일본은 전쟁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여러 부문에서 위기상황에 처하였고, 그 위기의 일정 부분을 조선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 해결책은 조선의 민중들에게 각종 헌금을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불교계는 전시체제 하에서 교단차원에서 헌금을 징수하였다. 종교는 어렵고, 힘들게 사는 민중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어야 한다. 전시체제 하에서 불교계는 정신적으로는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치라고 가르치고, 물질적으로는 곤궁한 삶을 더욱 어렵게 함으로써 종교 본연의 역할에 배치되는 행위를 하였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때 불교도들은 보시를 하였고, 이렇게 모아진 정성은 일본군의 군수품을 조달하거나 무기를 사는데 쓰여졌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은 1942년 5월에 1944년부터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발표가 있은 직후 총본사 종무총장 이종욱은 히로다 쇼이꾸(廣田鍾郁)라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징병제를 환영하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군에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내선일체·일시동인이 잘 시행되었다는 것이므로 기쁜 일이니 조선의 청년들은 기꺼이 징병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태고사는 1943년 8월 6일 오전 10시경에 승려 및 신도 100여명이 모여 징병제 실시 감사법요식을 가졌다.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에 대한 발표가 있자 당시 불교계 학승이었던 권상로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교리로 합리화시켜 주기 위해 좬임전의 조선불교좭라는 책을 발간하여 교리를 왜곡하였다.

1943년 1월에 발간된 이 책은 ‘성불은 전승이다’·‘계는 전투훈이다’·‘지계는 국방이다’·‘살생의 범위’ 등 20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살생의 범위’라는 절에서 태평양전쟁에서 영미의 군대를 살상하는 것은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많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불교는 불살생을 계율의 으뜸으로 삼고 있으며, 모든 생명을 고귀함으로 목적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숱한 공력을 들여쌓은 학문을 근본교리 마저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젊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데 사용하였다.

태평양전쟁이 길어지자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금속류의 부족현상은 심각하였다. 1939년 초에 이르면 불상과 치과에서 사용하는 금니를 제외하고 전면적으로 금의 사용을 금하였다. 총독부는 1941년 8월 30일부터 금속류 회수령을 시행하였다. 조계종 중앙종회는 임시총회를 열고 각 사찰에서 사용하지 않는 철제로 된 각종 기구와 불구류를 군 또는 면 연맹을 통해서 군부에 헌납하기로 결의하였다. 태고사가 중심이 되어 전개한 금속류 헌납운동에 많은 사찰들이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비중이 큰 범종이었고 그 다음은 유기가 차지하였다. 1943년 5월 24일 태고사는 경성과 경기 지역에서 모아진 범종과 기타 철제류 1,160점 4,545㎏을 헌납하였다.

전시체제 하에서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하여 총본사는 14세 이상 50세 미만인 승려들 2,939명으로 ‘조선불교근로보국대’를 조직하였다. 대장은 총본사 주지로 하였고, 각 도 단위로 분대를 두었다. 분대장은 각 본사 주지나 그 대리인 또는 말사 주지로 구성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농번기에 약 30일 동안 농촌의 농사일을 보충하는 것이었으며, 여비나 식비 기타 부대비는 관할 본사에서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다.

총독부는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점점 더 치열해지는 전시 상황 하에서 보다 더 강력하고, 신속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관공사립 행정기관과 산업부분 등의 기관은 보다 숙련된 지원체제를 갖추어야 하였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서 조선불교계의 주지들의 임기를 연장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사찰령시행규칙 제4조에 명시된 주지들의 임기를 3년으로 제한한 규정에 위배되었다. 총독부는 1944년 7월 21일자로 부령 제 280호를 공포하여 사찰령시행규칙 제4조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주지들의 임기를 당분간 연장하였다. 총본사 주지의 임기는 3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였다. 이것은 전쟁의 막바지에 후방지원 체제에서 주지가 경질됨으로써 빚어지는 차질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인력과 물자부족의 위기상황에 봉착하였고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식민지 조선에서 수탈을 강화하였다. 인력부족은 지원병제와 강제징용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물자부족은 죽도 끓여 먹기 힘든 상황에서 국방헌금을 내기를 강요하였고, 각종 금속류를 빼앗아갔다. 불교계도 이러한 수탈정책에 순응하여 불상을 제외한 각종 불구류까지 헌납하였다. 이것은 말이 헌납이지 강탈당하였다는 표현이 훨씬 적절하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극한에 이르면 변화하기 마련이다. 태평양전쟁으로 극에 달한 일본의 수탈은 패망을 불러왔고,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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