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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어떻게 처리할까?

기자명 법보신문

[김형효 칼럼, 불교의 철학적 읽기]

독 제거하면 약도 없어지는 게 이치

선악 초탈한 마음의 도리가 큰 관건

신문을 보면 악이 우리시대를 휩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악이 발호해서 인간의 지선한 도덕적 삶이 가능한 것인가 하고 회의를 느끼게 한다. 선과 정의의 승리를 주야간 생각하는 이들은 이런 악의 발호를 참을 수 없는 부조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악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이 세상의 현실이 그런 구조로 엮어져 있음에 어이하랴! 20세기 프랑스의 실존철학자인 메를로-뽕띠는 이 세상에 100%의 의미도, 100%의 무의미도 찾을 수 없는 부분적 의미밖에 없다는 것을 실토한 바가 있다. 이 말은 세상의 부분적 의미가 세상의 부분적 무의미와 서로 상통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겠다. 우리 시대의 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가장 간단한 답변은 정의의 사도가 출현해서 우리 시대의 악을 말끔히 청소했으면 좋겠다는 발원일 것이다. 나도 젊었을 때에 저런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저런 개념의 형성 원인은 아마도 주자학적 도학주의와 서양의 도덕주의적 종교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일도양단을 내리는 정의의 심판을 우리는 쉽게 상상한다. 선악의 일도양단에서 보면, 불교의 선악관은 매우 뜨뜻미지근해서 화끈한 맛이 없고 선명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고 세상공부를 익히다 보니, 불교의 저 뜨뜻미지근한 생각이 진실로 악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활인검이 동시에 살인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의 약이 오늘의 독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과거 절대왕조 시대에 국민들의 고혈을 빨던 화려한 궁전이 세월의 흐름에 의하여 국민들이 자랑하는 박물관으로 바뀐 경우가 많고, 정문(旌門)을 내걸고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던 효도열녀문이 가부장적 부권의 이기심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선과 악을 서로 별개의 것인 양 이원론적으로 따로 생각해 왔고, 선은 악을 박살내기 위하여 무장을 든든히 해야 된다고 다짐하곤 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선은 악의 공격에서 자신을 방어하기가 어려워질 것이겠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선은 악의 바깥에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도 않고,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의 구조로 상관적으로 동거한다는 것이다. 악은 선이 있기에 생기는 것이고, 선도 악이 없어지지 않기에 늘 생긴다는 아주 평범한 이치를 불교가 말해준다. 지금 설쳐대는 악이 없어진다고 가정한다면, 또 다른 악이 존재하는 선의 이면에 기생할 것이다. 선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악도 소멸되지 않는다.

돈은 많은 생명을 살리는 약도 되지만, 그 돈이 많은 생명들을 악으로 몰고 가는 마구니 파순의 역할을 틀림없이 한다. 독을 제거하면 약도 따라서 없어진다. 이것이 세상의 불변적 구조다. 어차피 세상에 악의 완전소탕이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지혜스런 사려(思慮)는 악과의 투쟁으로 세월을 보내기 보다 오히려 그 악의 에너지가 현실적으로 용출하지 않도록 마음을 정리정돈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하겠다.

 선의 에너지도 스스로 선의 에너지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 선의 에너지는 곧 악의 에너지로 돌변한다. 이것이 세상의 여여한 법칙이다. 정직이 선이라 하여 거기에 집착하면, 그 정직은 곧 경직이 되어 사람들을 모두 불편하고 불안하게 하는 독으로 변한다. 선악은 바깥에 따로 서있는 우상이 아니고, 내 마음의 쓰임에 따라 어떤 것이 선악으로 변한다. 악의 에너지로 흐르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양약은 곧 마음이 무(無)의 공(空)을 터득하는 도리라고 여겨진다. 선악을 초탈한 마음의 도리가 선악의 대결심리도 극복하고, 악에의 증오심도 무디어지게 한다. 악의 증오심도 이미 악에 물든 상태다. 돈을 활인검으로 쓰게 하는 마음씨는 돈에 대한 애증(愛憎)을 버리고 돈을 오직 돈으로만 보는 마음이겠다. 독일의 속담에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는 이미 죽고 말았다는 격언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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