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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36.

기자명 법보신문

‘나’ 집착 끊으면 닦을 것도 없이 변화한다

<사진설명>육조 스님의 행화도량 조계 남화선사 대웅보전에 모인 사부대중이 저녁 예불을 올리고 있다.

 

23. 행화(行化)

 

(단경을)이어받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비록 돈교법을 설하나, 근본을 알지 못함이라. 마침내 다툼을 면하지 못한다.
당시에도 돈오돈수·돈오점수가 있었는데 여기서의 돈교법은 몰록 깨달아서 몰록 닦는다고 가르치는 법입니다. 돈오돈수·돈오점수를 놓고 지금도 이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법으로써 서로 토론하고 부족한 쪽에서는 그걸 배우고 지혜가 수승한 쪽에서는 부족한 분들을 연민과 자비로 대해 그분들의 견해를 끌어 올려주는 관계가 되어야 정상인데,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하면서 시비로 법을 논한다면 그 자체가 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비하는 마음은 돈오돈수도 아니고 돈오점수도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시비를 하는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그 차이에 의해서 시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님이나 우리 문중 등의 인연에 따라서 다투는데, 그것은 패거리이지 법을 논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닙니다.

다만 법을 얻은 자는 자못 부지런히 수행을 해라
돈오돈수라면 다시 수행할 필요가 없는데 부지런히 수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돈오점수가 아니냐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뒤에서 보면 부처님 행을 수행해라 하는 말로 풀이가 됩니다. 부처님 행은 깨달은 사람의 일상행위를 말합니다.

다투는 것은 승부하는 마음이니 도와 더불어서 어긋나고 등진다.
다투는 마음은 도가 아닙니다. 돈오돈수·돈오점수를 떠나서 다투는 마음은 절대로 도가 아닙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놓고 시비를 하던지, 일상생활의 옳고 그름을 시비하던지, 국가간에 시비를 하던지 하면서 모든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자기를 학대하고 주변 사람을 학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님 방법대로 문제를 풀어가면 자신의 마음을 부드럽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만들어 갑니다. 불교는 자기를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기주의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고하고 생활하면 상대에게도 사랑과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원리가 그렇게 생겨져 있는데, 그것을 모르니까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존재원리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면 나를 사랑하고 상대도 사랑하게 됩니다. 자기가 이해하고 능력이 생긴 만큼 생활에 적응해 가면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게 되고, 그러한 능력을 100%로 만들어가는 수행이 바로 참선입니다.

 

24. 돈수(頓修)

 

세상 사람이 다 전하되 남종에는 혜능이고 북종에는 신수라 하니 근본 까닭을 알지 못함이니라. 신수 선사는 형남부 당양현 옥천사에 주지하면서 수행하고 혜능 대사는 소주성 동쪽 삼십오리 조계산에 주하니 법은 곧 하나이나, 사람은 남북이 있음이니라.
신수 스님은 현양부 옥천사에서 주지로 있으면서 수행하고 있고, 혜능 스님은 조계산 보림사에서 주지하면서 수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북쪽의 신수 스님이나 남쪽의 혜능 스님이나 ‘법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법은 둘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진리이고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도 남북이 없습니다. 우리가 남북이니 동서니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부호이지 북쪽과 남쪽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를 인해서 문득 남북을 세움이니라.
법은 한가지인데 사람이 남쪽에 있고 북쪽에 있으니까 남쪽은 혜능 스님, 북쪽은 신수 스님 이렇게 세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틀린 말입니다. 실제로는 남북도 동서도 없습니다.

무엇을 돈점이라 이름하는가. 법은 한가지로되 견해는 더디고 빠른 것이 있다.
점(漸)은 점진적이라는 말이고, 돈(頓)은 몰록 또는 단박에라는 말입니다. 법은 한가지이지만, 수행하는데 있어서 법은 빨리 되는 것이 있고, 또 늦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빨리 된다고 말하는 분도 있고, 늦게 된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통한 것, 이것만큼은 신수 스님이 육조 스님과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은 일자무식이면서도 제자들에게 교리같은 것을 전해듣고는 무슨 소리인자 다 알아들었고, 법문할 때 그것을 유효 적절하게 쓰시기도 했습니다.

일찍이 신수 스님은 사람들이 혜능 스님의 법이 빠르고 곧게 길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신수 스님은 지성 스님을 불러 말했다.
신수 스님이 혜능 스님보다 나이도 서른 두 살이나 많고, 뭐로 보든지 다른 것은 내가 나은데 법에 대해서만은 못하다는 것을 당신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덕이본에서 보면 신수 스님이 제자들에게 육조에게 가서 법을 배우라고 보내는 내용이 있는데, 그런 면을 보면 신수 스님도 참 훌륭한 분입니다. 굉장한 인격자라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여기 신수 스님이 부른 지성 스님이라는 분도 덕이본에서 보면 육조 스님이 법문을 하다가 ‘법 도둑질하는 놈이 여기 와 있구나’하니까, 꼼짝 못하고 일어나서 ‘제가 옥천사에서 왔습니다’라고 실토를 합니다. 이어서 육조 스님이 ‘니가 스파이구나’라고 하니까, 지성 스님이 ‘내가 속이고 있으면 스파이지만 말씀을 드렸으니 스파이는 아니지 않습니까’하고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그 말을 받아서 번뇌가 곧 열반이라는 것도 그와 같다고 법문을 하십니다. 모를 때는 번뇌와 열반이 둘이지만, 알고 나면 번뇌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를 때는 니가 스파이고 말하고 난 후에는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의 법은 이렇게 빠르고 쉬웠습니다. 육조단경이 다른 어록에 비해 말이 쉽지만 내용은 어떠한 어록 못지 않게 깊이가 있습니다. 성철 스님도 당신은 법문을 어렵게 하면서도 공부할 때 단경을 먼저 공부하라고 권했었습니다.

혜능 처소에 이르러서 예배하고 다만 듣되 내가 너를 시켜서 왔다고 말하지 말고, 듣고 얻은바 뜻을 기억해 취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해서 설하라. 그래서 혜능의 견해가 나와 더불어서 누가 빠르고 늦은 것을 보게 하되, 네가 반드시 일찍이 돌아와서 하여금 나를 개의하지 않게 하라.
신수 스님이 자기는 못 가고 제자에게 혜능 스님이 법 쓰는 것을 기억해서 내게 말해주면 내가 깨닫는 것을 빨리 깨닫게 하는지 늦게 깨닫게 하는지 살펴봐야겠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나쁜 뜻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으면 나를 배신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개의하지 않게 하라고 당부를 합니다.

지성이 기쁘게 시킴을 받들어 가지고 보름만에 곧 조계산에 이르러서 혜능 화상을 보고 예배하고 곧 듣되 온 것을 말하지 아니하니, 지성이 법을 듣고 언하에 문득 깨달아서 곧 본심에 계합하고 일어나 서서 예배해서 스스로 말하되, 화상이시여 제자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앞에서 덕이본을 예로 말할 때는 이 회상에 법을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실토를 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자신이 법을 듣고 본심에 계합하니까 실토를 하게 됩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육조 스님 같은 분이 말하면 자기 본래 마음하고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계합하는 것이고, 견성하는 것입니다.

신수 스님 처소에서는 계합해 깨달음을 얻지 못하다가 화상이 설하는 것을 듣고 문득 본심에 계합하오니 화상은 자비로서 원컨대 마땅히 가르쳐 보여주소서.

 

혜능 대사가 말하되, 니가 저곳을 쫓아 왔다면 응당 세작이다.

 

지성이 말하되, 말씀드리지 아니할 때는 곧 옳으나 말씀드렸으니 염탐꾼이 아닙니다.

육조 스님이 말하되, 번뇌가 곧 보리라는 것도 이와 같다.
우리가 모를 때는 번뇌가 있고 보리가 따로 있습니다. 때문에 번뇌가 없어져야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해서 그놈을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번뇌가 보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본래대로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본래대로 계합을 못하면 깨달음의 지혜가 번뇌로 바뀌는 것입니다.
절대로 없애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번뇌가 깨달음으로 변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없앤다고 하면 또 투쟁심이 일어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잘못하면 ‘저놈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견해가 맞지 않는 사람을 없앤다고 생각하지 않고 변화시키려고 하면 싸움도 줄어듭니다. 없앤다고 하니까 도장도 찍는 것입니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내려면 우리가 모두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부처님인데 ‘나’라는 집착 때문에 그 부처님 능력이 발휘가 안되어서 그렇지,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알면 닦을 것도 없이 그저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없앤다’와 ‘변화시킨다’는 말의 차이가 크지 않은 것 같아도 밖으로 나타날 때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은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착각에 빠지면 그것이 번뇌가 되고 착각을 깨면 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면 부처가 중생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처가 중생이 된다고 하니까 굉장한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없애야 또다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행위로 나올 때는 극단적인 행위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시킨다고 할 때는 절대 극단적인 행위는 나오지 않습니다.

대사가 지성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들으니 너의 스승이 사람을 가르치되 오직 계·정·혜를 전함이라 하니 너의 스승이 사람에게 가르친다는 계·정·혜는 어떤 것인가. 마땅히 나를 위해 설하라.
육조 스님도 이렇게 신수 스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신수 스님은 항상 누구든지 오면 계·정·혜 삼학을 닦아서 수행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신수 스님이 오는 사람마다 계·정·혜를 닦으라고 하는데 그게 어떤 내용인가 말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성이 가로되, 신수 화상이 말한 계·정·혜는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을 계라고 이름하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라 이름하고,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을 정이라고 한다.
여기서의 계·정·혜는 각각 분리돼 있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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