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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에 걸쳐 쓴 사랑의 고백

기자명 법보신문

『D에게 보낸 편지』앙드레 고르 지음 / 학고재

사랑이라는 오묘하고 달콤하고 냉혹하기까지 한 감정을 설명하고자 역사상 숱한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은 밤을 새우며 고민하였지만 여전히 사랑은 오리무중입니다. 결국 토파민이라는 화학물질로 사랑을 설명하게 된 요즘, 사람들은 자신이 쉽게 사랑에 빠지고 그만큼 쉽게 사랑의 열기가 식어가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랑, 그 따위 것은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의 장난일 뿐이니….

오스트리아 출신의 실존주의 사상가이며 언론인인 앙드레 고르는 25세 때 꿈처럼 아름다운 영국 여자 도린을 우연히 만납니다. 자기 같은 가난뱅이 유대인 청년에게는 너무 아름답고 생기발랄하여 도저히 넘보지 못할 여인이라 느끼면서도 한 달이 지난 뒤 발레리나처럼 총총히 길을 걸어가는 도린을 다시 발견한 청년 고르는 용감하게 제안합니다.

“춤추러 갈래요?”
“좋아요.”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나 사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딱히 내놓을 경력도 배경도 없는 한 청년이 그 후 프랑스의 쟁쟁한 지성인들 사이에서 두각을 보이고 활발하게 취재와 저술활동을 하게 되기까지 아내 도린의 내조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남편의 직장인 허름한 신문사로 함께 출근하여 산더미 같은 자료들을 정리하여 스크랩해준 아내가 없었다면 그가 그토록 믿을 만하고 체계적인 글을 쓸 수가 있었을까요? 가정교사자리를 알아보고 출판사에 취직해서 살림을 책임져주는 아내가 없었다면 그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신좌파의 이론가로 활동할 수 있었을까요?

세상을 향해 냉랭한 시선을 품고 자신에게 조금도 확신을 갖지 못했던 좌파 지식인 고르는 이렇게 아내의 숨결을 거쳐 정화되고 세련되어 가며, 그녀를 사랑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따뜻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저서 『배반자』 속에서 아내를 가리켜 ‘남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연약한 여자’로 평가절하 해버립니다. 지식인 남성의 교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그 글을 쓴 이후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부정직함과 비겁함에 고뇌합니다.

이 책은 곧 82세가 되며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더 줄었고 겨우 45킬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아내를 바라보며 남편이 털어놓는 사랑의 찬가이자 참회입니다. 무려 58년의 시간이 소요된 연애편지입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그는 2007년 9월22일 불치의 병에 걸린 아내 도린과 자택에서 동반자살 합니다. 세상에는 토파민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을 나눈 이런 연인도 있습니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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